영어 공부

회사가 업무와 직접 상관이 없는 경우에도 영어를 강요하는 것이 합리적이냐는 논쟁이 있었다. 물론 그것이 합리적이냐 아니냐는 것은 잠깐동안의 논쟁거리일 뿐, 선택권이 없는 피고용인들로선 회사에 맞출 수 밖에 없다. 나도 연수 한번 안 가본 토박이로서 아직까지도 영어 때문에 애를 먹고 있기는 하지만, 남이 시키는 공부 싫어하는 내가 그나마 이 정도라도 영어를 하게 된 데에는 두번의 계기가 있었다. 1. 중학교 2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날 우리집에 “Popular Electronics"라는 잡지가 배달되었다. 그런 잡지를 아무도 주문한 적이 없었는데, 누군가 정기구독하면서 주소를 잘 못 기입하는 바람에 우리 집으로 온 것이었다. Label의 주소는 분명 우리집이었기에 반송해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하고 누군가에겐 좀 미안하지만 그냥 보기로 했다. 그렇게 두달치를 공짜로 볼 수 있었다. 당시 토요일이면 세운상가에 가서 전자부품 사다가 이것 저것 만들어보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던 나로서는 언어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그 잡지를 탐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해석 안되는 문장이 수두룩했지만, 심지어는 광고까지도 재밌었다. 인터넷으로 뭐든지 찾아볼 수 있는 지금과 달리 그 당시엔 중학생이었던 내겐 일본 잡지 베껴 만든 우리나라의 관련 잡지 하나 외엔 다른 정보 채널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Popular Electronics는 그야말로 가뭄 끝 단비였다. 이걸 눈치채신 부모님이 “그 잡지 정기구독시켜줄까?“하고 제안하셨고 나로선 물론 이 기회에 아들 영어 공부 시켜보겠다는 저의가 100% 엿보였지만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한달동안 기다리던 잡지가 배달되면 닳도록 열심히 보았으니, 잘 모르는 단어가 있어도 대충 넘어가면서 읽을 수 있는 독해 실력은 그 때 많이 늘었던 것 같다. 2. 첫 직장(ETRI)에서 친하게 지내던 직장 선배 한 분이 어느날 갑자기 영어 소설책을 한 권 내게 들이밀면서 “이거 읽어봐"하셨다. 그 때까지 잡지나 전공 서적은 영어로 된 것을 많이 읽었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으나, 소설책은 읽어본 적이 없었다. 대충 들춰보기만 해도 그림 하나 없이 빽빽히 텍스트로만 채워진 영어책을 읽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책을 읽은 즐거움보단 무리한 독해 숙제처럼만 보였다. 내가 난색을 표했으나, 그 선배는 강압적으로 강요했다. 결국 읽지 않을 수 없었는데, 다행히 내가 좋아하는 SF였고 나중에 알았지만 상당히 쉬운 영어로 쓰여진 책이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SF 좋아하는 줄, 영어 실력이 어느정도인 줄 잘 아는 선배가 그래도 영어공부 한번 시켜보려고 신경써서 골라준 책이었던 것 같다. 암튼, “자기야 외국에서 공부했으니까 쉽겠지만, 왜 나한테까지 영어를 강요하는거야…” 하는 불만을 가진채로 읽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재밌었다. 물론 한글로 쓰여진 책보다 몇 배 더 오래 걸렸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한글책처럼 술렁 술렁 읽지 않고 한문장 한문장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읽다보니 더 재미있었던 것 같았다. SF를 좋아해서 국내에 번역된 SF는 대충 다 읽었던 나로선 새로운 재미가 하나 생긴 셈이어서 그 이후에 영어 SF 소설을 여러권 더 사서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선배가 먼저 권해줬던 책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쉬운 것이었던가를 깨닫게도 되었지만, 어려운 만큼 재미도 더 있더라는 것을 알았기에 많은 시간을 들여서라도 읽게 되었다. 첫번째 계기는 우연이었고 두번째 계기는 고마운 선배의 배려 때문이었지만 암튼 내 의지와는 별 관계없이, 또 즐기면서 영어를 공부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 평소에 나는 영어공부할 시간 있으면 전공을 차라리 더 하고 영어는 포기하는 것이 내 경쟁력/가치를 더 효율적으로 키우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영어에 대해 최소한의 자신감은 생겼고 이후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선배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