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웨어 제조사의 소프트웨어

얼마 전 HP C6180 복합기를 구입했다. 프린터, 스캐너, 복사기, 팩스 기능이 하나로 다되고 각각의 기능도 괜찮았다. 더군다나 무선랜까지 기본으로 내장되어 있어 PC와 좀 떨어진 곳에 두고 쓰기도 편했고 가격도 (물론 잉크에서 남긴다지만) 비싸지 않았다. HP의 잉크젯 프린터는 오랫만에 써보는 것인데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문제는 소프트웨어. 이 프린터를 사기 전에 읽은 아마존의 사용자 리뷰에서 “…제품은 매우 만족스러우나 소프트웨어가 문제. HP가 내 PC를 점령했다"고 한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온갖 잡다한 기능이 다 들어 있는데다 전체적인 품질이 낮고, 인스톨도 어려웠다. 인스톨 과정에서 “최신 버전을 확인할 것이냐"고 해서 YES를 선택했더니 아침에 시작해놓은 인스톨이 퇴근후에도 끝나지 않아 다시 시작해야 했고, 시스템 트레이에 생기는 아이콘은 PC가 꺼질 때 제대로 종료되지 않아 말썽을 일으켰다. 이런 경험은 삼성의 핸드폰을 구입했을 때도 겪었다. 삼성 핸드폰의 하드웨어나 기구는 참 완성도가 높은데 소프트웨어는 영 아니다. 단말 내의 소프트웨어가 그런 이유는 이통사와의 관계 때문에 그렇다고 쳐도 (이걸로 전부 다 변명이 되지는 않지만), PC 매니져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은 남 탓을 할 수가 없다. 도대체 기능도 별 것 없는 소프트웨어가 100M가 넘어가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고 (하청 업체에서 완성된 바이너리의 용량에 비례해서 개발비를 받나?) 디자인이 유치한 것은 주관적이라고 하더라도 usability도 안 좋다. 애니콜 사용자 중 많은 수가 설치하는 소프트웨어를 시스템 트레이에 상주시키기만 하면 온갖 BM이 엮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삼성 이미지만 나쁘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하드웨어 제조사들이 만든 소프트웨어는 품질이 나쁘다. 이익을 조금이라도 더 남기려는 욕심으로 여러 기능을 포함시키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경우도 많지만, 그냥 소프트웨어의 개발이나 품질관리 실력이 떨어져서 그런 측면이 더 큰 것 같다. 반대의 경우로 애플의 iTunes를 보면, iTunes Music Shop과의 연계나 QuickTime의 번들 다운로드와 같은 사업적 니즈가 반영되어 있음에도 좀 무겁다는 것 외에는 소프트웨어의 완성도가 전반적으로 높은 것으로 보아, 이건 회사의 실력에 더 관계있는 것 같다. 제조업체 경영진 마인드로 소프트웨어의 개발과 품질 관리가 잘 안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보이기도 한다. MS도 소프트웨어의 품질이 높아진 것은 비교적 근래이니까. 제조업체의 경우와는 달리, 소프트웨어 전문 업체가 사업적 필요성을 사용자 편의보다 우선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예전의 RealPlayer가 대표적인 경우인데, 공짜 버전을 숨겨놓고 웬만하면 유료 버전을 구입하도록 한 것도 그렇고, 한동안은 거의 스파이웨어에 가까운 것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좀 아는 사람들로부터 절대로 설치하면 안되는 소프트웨어로 꼽히기까지 하였다. 이번에 새로 발표한 버전은 다른 미디어 플레이어와 다투지도 않고, 시스템 트레이에 아무것도 설치되지 않으며 설치에서 실행까지 전반적으로 가벼워졌다. 공식 블로그에서 얘기하고 있듯이, 사용자가 어떤 회사의 소프트웨어를 믿고 설치해서 사용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그 회사의 브랜드 가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RealNetworks의 경우엔 이런 교훈을 비싼 값을 치르고 얻었는데, 위에서 언급한 하드웨어 제조사들도 신설한 사업 부서의 단기 매출을 올리기 위해 사용자가 원치도 않는 기능을 강제로 설치시키거나 외주 개발 용역을 시키면서 가격 깍고 무리한 일정만 강요하여 낮은 품질의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당장은 하드웨어 품질에 비해선 눈에 덜 띄겠지만 장기적으론 그 회사의 브랜드에 얼마나 해를 입히는지를 깨달았으면 한다. (Disclaimer: RealPlayer를 만드는 RealNetworks는 제가 다니는 회사의 母회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