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 사용자 매뉴얼

로봇공학으로 학위를 받고 굴지의 대기업에 입사할 때만 해도 새벽 5시에 “로봇이 방귀를 뀐다"는 전화를 받고 깡시골로 달려가게 될 줄은 몰랐다.

전화를 건 사람은 최 할아버지였다. 아침잠과 매너가 둘 다 없는 사람이 누군지는 휴대폰 화면을 안 봐도 뻔했다. KAMT NG 로봇을 ‘깡통 로봇’이라고 읽어서 다들 그렇게 부르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조 과장, 좋은 아침이야.”

으…, 한동안 뜸했었는데…. 깡통이 또 무슨 사고를 쳤을까.

“오늘은 무슨 사고 때문이 아니고 그냥 재밌는 일이 있어서 전화한 거야. 며칠 전에 사다리가 부러져서 깡통이 떨어졌거든. 그때부터 이 녀석이 가끔 방귀를 뀌네그려. 냄새가 아주 고약해. 소똥 냄새 나는 시골에 오니까 이 녀석도 점점 사람이 되어가나 봐.”

방귀?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최 선생님, 깡통에게 밖에 나가 있으라 하고요. 절대로 가까이 가지 마세요. 바로 가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커피를 석 잔째 마셔가며 자율주행도 안 되는 차로 새벽길을 달려가는 것이다.

이 모든 게 박호성 전무 때문이었다.

그는 유명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다가 보고서 생성 AI 때문에 일감이 줄어들자 우리 회사에 신사업 담당으로 왔다. 기술은 전혀 모르지만, 초인적인 설득력을 갖고 있어서 AI마저도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오자마자 신생 로봇 회사인 한국자동제조기술(KAMT, Korea Autonomous Manufacturing Technology)에 투자하더니 제대로 검토도 안 하고 그 회사의 ‘NG(Next-gen General-purpose)’ 로봇의 도입을 추진했다. 곧이어 로봇을 억지로 공장에 투입하고는 언론사들을 불러 제조업의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한 사례로 홍보했다. 하지만 이미 고도로 자동화된 우리 회사의 생산 라인에는 이 로봇이 할 일이 별로 없었고, 그나마 할 수 있는 일도 속도가 너무 느렸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로봇 시연 영상이 5배속인 줄 몰랐다고 한다.

로봇을 잘못 도입했다는 소문이 돌자 박 전무는 정부와 지자체를 설득해 ‘농촌 고령화 문제 해결을 위한 휴머노이드 실증 과제’를 만들어냈다. 농촌을 살리기 위해 ‘회사가 가장 아끼는 최첨단 로봇’들을 과감히 현물 투자하기로 했다. 나는 로봇을 전공한 죄로 이 과제에 끌려 들어갔다.

혹시 오해할까 봐 말해두는데, NG 로봇은 최신 기술이 집약된 최첨단 휴머노이드 로봇인 건 맞다. 사람이 일하던 환경과 도구를 그대로 이어받아 일할 수 있고 제조에 특화된 검사와 진단 기능을 갖췄으며, 실세계와 시뮬레이션 환경의 다양한 데이터를 학습한 파운데이션 모델을 기반으로 스스로 공정을 계획하고 수행할 수도 있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사람의 행동을 보고 따라 하는 자체 학습 기능도 갖췄다.

그러나 수억 년간 온갖 환경을 거치며 진화해 온 인간만큼 유연하지 못했고, 정해진 작업에는 전용 기계만큼 효율적이지 못했다. 또한 모든 복잡한 시스템이 그러하듯 아직 숙성될 시간이 필요했다. 무턱대고 공장에 투입했다가 실패했는데, 애초에 고려하지도 않았던 농촌 일을 잘 해낼 리 만무했다.

아니나 다를까 깡통은 배치되자마자 연이어 사고를 쳤다. 농촌 일에 필요한 학습 데이터를 모으고 학습시킬 시간이 없었으니 당연했다. 박 전무는 NG 로봇이 기계와 제조에 관한 범용 지식을 갖고 있고 학습 능력도 있으니, 농기계와 시설을 수리하고 필요한 기구를 만들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대충만 아는 사람들은 이름만 같으면 다 같은 것인 줄 안다. 최신 공장의 기계와 구닥다리 농기계보다는 박 전무와 능구렁이 사이의 공통점이 더 많을 거다.

깡통은 원래 덜덜거리는 게 정상인 경운기의 소리를 스펙트럼 분석한 결과, 베어링이 위험한 수준으로 마모되었다면서 엔진을 모두 분해해 버렸다. 또 무너진 돌담을 고치랬더니 해가 질 때까지 모든 돌의 형상을 스캔하고 구조 시뮬레이션만 돌리고 있었다. 도킹 스테이션과 깡통이 머무를 창고 문에 자물쇠를 설치하라고 했더니 자신의 마그네틱 그리퍼로만 열 수 있는 잠금장치를 만들어 자신만 사용할 수 있도록 문 안쪽에 달아 버렸다. 압권은 강풍에 망가진 온실을 튼튼하게 수리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였다. 깡통은 어쩌다 보니 그때까지 연결되어 있었던 회사 인트라넷을 통해 값비싼 탄소섬유 강화 복합 소재 파이프를 항공 드론 긴급 배송으로 주문해서 핵 방공호로 써도 될법한 구조물을 만들어놨다. 덕분에 나는 하루 종일 회계팀에 해명하고 시말서를 쓰면서 박 전무에게 사정해야만 했다.

그런 일이 발생하기 한참 전부터 깡통의 문제를 지적했던 사람은 로봇공학으로 학위를 받은 내가 아니라 시골의 한 공무원이었다.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실증 과제 설명회를 개최했을 때였다. 마치 스티브 잡스의 환생인 듯 청바지에 검은 터틀넥을 입고 연단에 오른 박 전무는 휴머노이드 로봇과 함께할 아름다운 미래를 소개했다. 의혹으로 가득했던 주민들의 눈빛이 어느새 벅찬 감동으로 축축해졌다. 나는 여러 번 들은 얘기였기에 앞줄에 앉아 경청하는 척 고개를 세운 채 졸고 있었다.

“질문 있습니다.”

내 바로 뒤에서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내 또래의 젊은 여성이 손을 들고 있었다.

“저는 스마트농업 담당 하수진 주무관입니다. 먼저 이런 최첨단 로봇과 함께 기술 지원까지 제공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정밀한 휴머노이드 로봇이 우리 지역 환경에서 주민들과 함께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을지 검토가 필요한데요,”

알고 보니 하 주무관은 지자체 소속으로 이 과제의 성과를 평가할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어서 KAMT NG 로봇의 IEC 60529 IP 등급1이 어떻게 되는지, ISO 134822 인증은 받았는지, 난 들어본 적도 없는 ISO 251193의 대상인지, MTBF4와 MTTR5은 어떻게 되는지, 새로운 태스크를 학습시키는 프로세스와 소요 비용은 어떻게 되는지를 물었다. 당황한 박 전무는 그런 자세한 내용은 별도 문서로 제공하겠으며 우리 로봇은 업계 최고 수준이라는 말을 표현만 바꿔가며 되풀이했다. ‘어떻게 저런 규격을 다 알지?’ 박 전무를 저토록 절절매게 만들다니, 순간 내가 어느 회사 소속인지 잊어버리고 짜릿한 쾌감에 전율했다.

“배터리의 실효 작동 시간은요? 로봇 스스로 핫스왑6할 수 있나요? 야외에서 오랫동안 일해야 할 경우, 스왑 스테이션은 그곳까지 어떻게 이동시킬 수 있죠?”

배터리 작동 시간은 모든 휴머노이드 로봇의 가장 큰 문제들 중 하나였다. KAMT NG는 셀프 핫스왑 기능이 있어서 배터리가 방전되면 스스로 도킹 스테이션에 가서 배터리를 교체한다. 그런데… 아차! 도킹 스테이션은 단단한 바닥에 고정되어야만 하고, 충전과 도킹 기구를 위한 전력이 필요하다.

하 주무관의 오라가 회의실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고 박 전무의 얼굴은 흙빛으로 어두워졌다. 난 그제야 내가 어느 회사 소속인지 생각이 났…던 것은 아니고, 그저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저는 이번 과제의 기술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조민준이라고 합니다. 로봇 기술에 관해 의외… 아니, 정말 잘 아시는군요. 언제 시간 내주시면 차라도 한 잔 마시면서 제가 NG 로봇에 대해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네, 그래 주세요. 자료 먼저 보내주시고요. 하지만 배터리 문제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 지금 대답을 듣고 싶네요.”

그녀는 사무적으로 대답했지만 아무튼 긍정이었다. 차 마시자는 부분을 듣긴 한 걸까? 가슴이 쿵쾅거렸다. 나도 부정적으로 대답할 수는 없었다.

“음…, 농촌에서 일하려면 당연히 최소 8시간 이상 작동할 수 있어야죠. 그 문제는 이미 솔루션을 생각해 뒀습니다. 따로 뵐 때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솔루션은 그 순간 생각해 냈다. 나는 마치 결정 권한이라도 가진 척 대답했다.

“우리 회사 최고의 엔지니어들을 이 과제에 투입했습니다. 앞으로도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박 전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를 도와줬다. 그때 눈물이 날 뻔했는데, 감동을 받아서였는지 어처구니없어서였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도착해보니 깡통은 마을회관 앞 공터에 서 있었다. 일하지 않을 때는 조금 떨어진 창고의 도킹 스테이션에 대기하도록 되어 있는데, 내가 말한 대로 최 할아버지가 깡통에게 지시한 모양이었다.

나는 20미터쯤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 트렁크를 열었다. 혹시나 이런 일이 발생할까 싶어 장비들을 챙겨뒀었다. 탐지기를 켜보니 수치는 정상이었고, 코를 킁킁거려 보지만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 방독면을 착용하고 깡통에게 다가갔다. 깡통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조 과장님.”

마스크를 썼는데도 날 알아봤다. 업무 수행 중이 아니고 슬립 상태도 아닌 때에는 주위 환경을 모니터링하면서 사회적인 반응을 하게 되어 있다. 깡통은 휴머노이드라고는 하지만 불쾌한 골짜기와는 거리가 먼, 말 그대로 금속 깡통이다. 이럴 때 약간의 사회적 반응만으로도 사람들은 로봇을 의인화하고 편하게 대하게 된다. 주민들이 깡통이라는 이름을 쓰게 놔둔 이유이기도 했다.

“깡통, 대기하는 동안 액화 암모니아를 시간당 얼마나 소모했는지 알려줘.”

“시간당 0.204리터를 사용했습니다.”

휴대폰을 꺼내 계산해보니 기본적으로 소비하는 에너지 외에 유출로 인한 감소는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최 할아버지는 항상 악취가 난다고 하지 않고 ‘가끔 방귀를 뀐다’라고 했다. 움직일 때 암모니아가 조금씩 누출되는 모양이었다.

로봇은 사람과 달리 서 있기만 해도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자세를 유지하려면 계속 모터를 제어해야 하고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NPU도 계속 동작하기 때문이다. 깡통은 초기의 휴머노이드 로봇에 비하면 효율적이긴 하지만, 여전히 온종일을 배터리로 버틸 순 없었다. KAMT에 액화 암모니아를 사용하는 연료전지(DAFC7)를 깡통에 설치해달라고 요청한 이유였다. KAMT가 NG 로봇의 후속으로 곧 출시할 NNG, 즉 차차세대 로봇(KAMT의 기술력이 작명 실력보다는 훨씬 나아서 다행이다)에 탑재될 제품이었고, NG와 NNG는 기본 구조에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무리한 요구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암모니아 가스 관련 안전 규정, 누출을 감지했을 때의 비상 대처 프로세스의 백포트8 등의 문제로 불가하다고 했다. 나는 하 주무관에게 했던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계속 읍소하고 협박해야만 했다. 마침내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각서에 서명하고서야 깡통에게 DAFC를 달아 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순간 깡통의 거대 방귀가 폭발해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모두 내 잘못이었다.

깡통은 리어 패널이 우그러져 있었다. 사다리에서 떨어질 때 그랬던 모양이었다. 조심스레 고정 나사를 풀고 패널을 열었다. 우그러진 곳이 액화 암모니아 연료 라인과 연료전지 스택의 주입구를 강하게 눌러 그 연결 부위가 변형되어 있었다. 탱크의 메인 밸브를 잠그고 멀리 물러선 후 깡통에게 천천히 땅바닥에 쪼그려 앉으라고 소리쳤다. 전력이 끊기기 전에 깡통이 안정적인 자세를 취해야 했는데, 움직이는 순간 암모니아가 샐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KAMT의 담당자에게 전화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나 때문에 큰일 날 뻔했다고 소리를 질러댔고, NNG였으면 가스 누출 센서와 대응 소프트웨어 덕분에 위험하지 않았을 거라고 몇 번을 강조했다. 조금 진정이 되자 그는 리어 패널이 연료전지를 누른 부분은 자기네도 검토할 필요가 있겠다고 하면서 깡통의 연료전지를 새 걸로 교체하고 변형된 것은 수거해 가기로 했다. 또 한 번의 사태를 겨우 넘겼다.

전원이 꺼져서 진짜로 깡통이 되어버린 녀석 옆에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 한숨 돌리고 있는데, 최 할아버지가 마실 걸 들고 왔다.

“이 녀석은 왜 대낮부터 자고 있나?”

“부품을 교체해야 합니다. 지금 가지고 오고 있어요.”

“흠, 대장 쪽 부품인가? 고장 나면 방귀를 뀌게 된다니.”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라도 다음에 또 그런 냄새가 나면 바로 피하세요. 그리고요…”

나는 최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하 주무관에게는 방귀 얘긴 비밀로 해 주시면 안 될까요?”

할아버지는 씩 웃으며 나를 흘겨보더니 내 어깨에 팔을 걸치고 소곤거렸다.

“걱정말게. 내가 그 정도 눈치도 없겠나?”

내가 너무 티를 냈나? 하 주무관을 여러 번 만나기는 했다. 이곳에 출장을 올 때마다 구실만 있으면 미리 연락해서 만났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공적인 만남일 뿐이다. 기술 자료를 전달하고, 깡통의 활동에 대한 피드백과 개선 요구사항을 받고, 기능 개선 로드맵을 전달하는 등 뭐 그런 일들이었다. 어쨌든 이 과제의 성패가 그녀의 평가에 달렸다. 담당 직원으로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초기의 문제점들을 수정하고, 주민들도 깡통의 특성과 한계에 익숙해짐에 따라 요즘 한동안 올 일이 없었다. 그녀를 본 지도 꽤 오래되었는데, 이번에는 하도 급하게 오느라 만날 구실을 만들고 연락할 겨를도 없었다.

“우리한테도 깡통은 소중해. 이 녀석이 좋은 평가를 받아야지.”

“네?”

주민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지난번 온실 보수에 쓰고 남은 탄소섬유 파이프로 다른 시설들을 보강했다고 들었는데, 앞으로도 그런 일이 계속될 거라고 기대하는 걸까? 그런 값비싼 재료를 계속 공짜로 제공할 수 있다면야 나도 좋겠지만, 깡통은 이제 회사 인트라넷에 접속할 수 없다.

최 할아버지는 하 주무관과 잘 좀 얘기해 보라고 하고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다. KAMT 담당자가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고, 나는 그때까지 할 일이 없었다. 차로 돌아가 의자를 뒤로 눕히고 눈을 감았다. 평소보다 두 시간 일찍 일어나서 머리가 띵했지만 긴장했던 탓에 금세 잠이 들지는 않았다. 어쩌다 내 커리어가 이렇게 됐을까? 사람이 하던 일을 로봇이 모두 대신하는 날이 와도 그 로봇을 개발하고 관리하는 사람은 필요할 거라는 생각으로 로봇 공학을 공부했는데, 이 외진 곳까지 와서 방귀 뀌는 로봇의 뒤처리나 하고 있는 처지라니….

영화를 하나 골라서 보기 시작했다. 내 처지가 힘들게 느껴질 땐 더 나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보며 내 문제는 잊어버리는 게 최고다. 죽도록 고생만 하던 남주인공이 마침내 여주인공과 잘 되려는 순간 휴대폰이 진동했다. 하 주무관의 메시지였다. 그녀가 먼저 연락한 것은 처음이었다. 메시지를 여는 손이 덜덜 떨렸다.

여기 오셨다면서요? 잠깐 뵐 수 있을까요?

그녀는 마을에서 좀 떨어진 찻집에서 보자고 했다. 찻집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노트북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일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사진이라도 찍어 보관하고 싶었지만 들킬까 봐 참았다. 내가 자리에 앉자 그녀는 비로소 고개를 들고 환히 미소 지었다. 오전 내내 날 괴롭히던 두통이 눈 녹듯 사라졌다.

“오랜만이에요. 왜 이번엔 미리 연락 안 주셨어요? 최 할아버지가 조 과장님 오셨다고 하시더라고요. "

“아, 너무 급하게 오느라….”

그녀는 나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위급한 일이라도 있었어요?”

가슴이 덜컹했다. 눈치챘나? 최 할아버지가 고자질했을까?

“아뇨! 그냥… 교체할 부품이 있는데 업체하고 시간을 맞추다 보니….”

“그래서 그 업체는 만나셨어요?”

“아뇨, 아직 오려면 멀었어요. 저 지금 시간 많아요.”

난 바보다. 급하게 왔다면서 시간이 많다고?

“아! 글쎄 급하게 오는데 도중에 약속을 바꾸더라고요. 제가 이해해야죠, 뭐.”

그녀는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이제 과제 평가보고서를 작성해야 해요. 그 얘기 좀 하려고요.”

벌써 그렇게 되었나? 1단계 기간이 길진 않았지만, 생각보다 순식간에 지나갔다. 많은 사건이 있었고 어떻게든 해결했으며, 지금 나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이 사람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비록 일 얘기밖에 못 했지만….

“사전 설명회 때 제가 이런저런 문제 가능성을 지적했던 것 기억하세요? 그때 너무 까다롭게 굴어서 죄송했어요. 하지만 지금 봐도 그때 걱정했던 일들이 기우는 아니었어요.”

그녀는 노트북을 돌려 내게 화면을 보여줬다. 깡통이 저지른 사건들과 수많은 문제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나도 다 아는 내용이었고, 반박할 수 없었다. 힘이 쭉 빠졌다. 내 몸이 배터리가 방전된 휴머노이드처럼 느껴졌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 과제는 1단계로 종료되겠네요.”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노트북을 덮었다.

“이 부분을 다시 작성하려고요. 요즘 한동안 안 오셨잖아요. 그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아세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가제본된 책을 꺼내 들었다. 표지에는 촌스러운 폰트로 ‘깡통 사용자 매뉴얼’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곳 주민들이 함께 만든 책이에요. 어떻게 하면 깡통에게 효과적으로 일을 시킬 수 있는지, 어떤 일은 잘하고 어떤 일은 못 하는지, 새로운 일을 가르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리되어 있어요.”

나는 책을 펼쳐봤다.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문법은 엉망이었지만 내용은 대부분 정확했고, 내가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사항들도 적혀 있었다.

“요즘 마을에 활기가 돌아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깡통을 시골에 갓 내려온 어리바리한 청년처럼 대해요. 깡통의 실수를 얘기하면서 함께 웃고, 가끔 잘한 일도 공유해요. 다음 달에는 깡통에게 커피 내리는 법을 가르쳐 볼 거래요. 일 없을 땐 마을회관에서 바리스타 시킬 거라고요.”

나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깡통에게 사회적 반응이 프로그래밍되어 있기는 했으나 이런 효과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주민들이 해낸 일이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비싸고 고장 잘 나는 로봇이 사실 실용적이진 않아요. 하지만 제가 너무 기술적인 측면만 생각했나 봐요. 저는 깡통이 지금 이대로도 우리 마을에 도움이 되고, 앞으로 더 개선될 여지도 있다고 생각해요. 과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바보같이 고개만 끄덕였다.

“휴머노이드 로봇이 고령화된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논문을 써 볼까 해요. 2단계 과제에도 그런 점을 반영하고요. 과장님이 계속 오셔서 저랑 토의도 하고 기술적인 지원도 해 주시면 좋겠어요. 괜찮으시면 박 전무님께는 제가 얘기할게요. 제 요청은 다 들어주시더라고요.”

이것이 내가 박 전무마저 구슬리는 그녀와 어리숙한 게 매력인 깡통을 계속 만나러 오게 된 사연이었다. 앞으로 또 벌어지게 될 예기치 못한 일들을 기대하면서 나는 환히 웃었다.

깡통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의 기술트렌드 매거진 ‘이슈픽’ 2025-0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1. 전기전자 장비의 외함이 먼지나 수분 침투로부터 얼마나 보호되는지 나타내는 국제 표준. IP 등급은 이 표준에 따라 보호 수준을 숫자 두 개로 나타낸 코드이다. ↩︎

  2. 개인용 로봇의 안전성에 관한 국제 표준. 로봇이 사람과 상호작용할 때의 안전 요건과 테스트 방법 등을 정의한다. ↩︎

  3. 농업 및 임업용 기계의 제어 장치의 기능 안전 및 관련 전자 제어 시스템에 관한 국제 표준. ↩︎

  4. Mean Time Between Failures. 시스템이 고장난 후 다음 고장이 발생할 때까지의 평균 시간. ↩︎

  5. Mean Time To Repair/Recovery. 시스템 고장 발생 시 이를 수리(복구)하여 정상 가동시키는 데까지 걸리는 평균 시간. ↩︎

  6. 시스템의 전원을 끄지 않고 작동 중인 상태에서 특정 부품을 교체할 수 있는 기능. ↩︎

  7. Direct Ammonia Fuel Cell (직접 암모니아 연료전지): 별도의 수소 변환 과정 없이 액체 암모니아를 직접 연료로 사용해 전기 에너지를 생산하는 연료전지의 한 종류. 상온에서 10 bar 정도의 압력으로 쉽게 액화되어 수소보다 부피당 에너지 밀도가 월등히 높고, 리튬 이온 배터리보다 훨씬 높은 무게당 에너지 밀도를 가진다. ↩︎

  8. 신버전 소프트웨어 또는 시스템의 기능을 이전 버전에 포팅하는 작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