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지맥

“어허, 당장 뛰어오라니까. 그놈이 그 흉측한 손, 아니, 앞발인가? 그걸로 날 폭행하고 기물파손까지 했다고. 내가 방송국에 알리려다 일단 거기 전화한 거니까, 각오하고 오는 게 좋을 거야.”

지맥이 그랬을 리 없다. 무거운 것을 옮기다 실수로 기물파손을 했을 수는 있어도, 폭행은 말도 안 된다. 지맥이 단지 뇌에 컴퓨터 달린 침팬지가 아니라는 것은 구닥다리 AI 스피커도 안다. 유전자 조작으로 온순해져 사람한테 대들지도 못하는데 폭행이라니. 내가 배달센터 일을 시작하고 겨우 삼 주 동안에도 별별 진상이 다 있었다. 배달이 늦거나 포장에 털이 묻어 있다고 배송료 못 내겠다는 경우는 있었지만 폭행에다 기물파손은 참신했다. 어쨌든 고객 불만이 있으면 내 인센티브가 날아가기 때문에 노인이 사는 언덕 위 낡은 아파트까지 헐떡이며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좀 찜찜하기는 했다. 그 집에 배달 갔던 지맥 50439를 원격 접속해보았더니 위치는 아파트 부근으로 나타났지만, 명령에 응답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삐거덕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문밖에는 50439가 끌고 갔던 배달 카트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인터폰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오공택배 관악배달센터의 김우진 매니저입니다. 박영호 선생님이시죠?”

“뭐 하다 이제야 오는 거여? 내가 변호사한테 연락하려고 했어. 내가 잘 아는 소송 전문 변호사가 있거든. 너네 회사 아주 그냥 작살 내려고 말이야. 폭행당한 데다 물질적, 정신적 피해까지 입었는데, 어떡할 거야? 이거 방송국에 제보하면 얼마나 주는지 알아?”

내가 오길 별렀다는 듯, 여든은 됨직한 박영호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속사포처럼 불만을 쏟아놨다. 잔뜩 화난 얼굴에서 침이 튀고 퀴퀴한 입 냄새까지 났다. 기습 공격을 받은 나는 한 걸음 후퇴하며 말했다.

“선생님, 진정하시고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시 차근차근 말씀해주세요. 다 해결해드리겠습니다.”

“그래, 너네 원숭이가 말이야.”

“지맥 말씀하시는 거죠? 유전자 공학과 첨단 컴퓨터로 지능이 증강된 침팬지입니다. 원숭이가 아니라.”

“침팬지나 원숭이나 그놈이 그놈이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무튼, 그놈이 말이야, 들어올 때부터 나를 기분 나쁘게 쳐다보더라고. 그리곤 생수를 배달하고 나서 글쎄 내 팔을 막 잡아끌길래 뿌리쳤더니 저걸 저렇게 부숴버렸다고.”

물이 흥건한 식탁 위에는 낡은 꽃병이 넘어져 깨져있었다.

“지맥이 선생님 팔을 잡아끌었다고요? 여기 통로가 좁다 보니 지나가다 선생님과 살짝 닿았는데, 선생님이 밀치니까 그 녀석이 식탁에 부딪힌 것 같은데요.”

“아니, 우리 집이 좁은 게 문제고 꽃병은 내가 부쉈다는 거야, 지금?”

“아니요, 그런 말씀이 아니라―”

“이런 데 좁은 데 산다고 사람 막 무시하고 그러면 안 돼. 내가 할망구 가고 나서 자식 놈들 꼴 보기 싫어서 재산 떼줘 버리고 줄여서 온 집인데, 나도 원래 더 비싼 아파트에 살았었다고. 게다가 이 꽃병은 할망구가 매일 물 갈아주며 제일 아끼던 건데 이거 어떡할 거야?”

“아, 네, 그런 뜻이 아니고요, 꽃병은 저희가 보험으로―”

“내가 지금 겨우 꽃병 값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 이럴 줄 알았으면 이 동네로 안 오는 건데. 전에 살던 집에는 그 뭐시기냐 로봇 택배인가 그놈, 그 바퀴로 굴러가는 거 있잖어. 그놈이 배달해줬는데 말이야. 근데 여기는 벨 소리에 문 열었더니 원숭이가 딱 나타나는 거야.”

바퀴로 굴러가는 배달봇은 이런 낡은 아파트나 다세대주택에는 들어오지도 못한다. 그건 자동 개폐 방화문 같은 로봇 친화 규격이 적용된 신규 아파트에만 들어갈 수 있다. 생수를 집안으로 들여다 준다던가 포장 박스를 치워 준다던가 그런 서비스도 없다. 그저 현관문의 개구멍―정식 명칭은 택배 플랩이지만 다들 그렇게 불렀다―으로 밀어 넣을 뿐이다. 어딘가 최고급 아파트에서는 영화에나 나올법한 휴머노이드 로봇도 테스트하고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한 번에 물건을 몇 개 운반도 못 하는 놈이 엘리베이터나 차지하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걸 주민들이 싫어했고, 어차피 천문학적인 비용 때문에 상용화는 요원한, 마케팅 목적의 시연이었을 뿐이었다.

“선생님, 저희 지맥은 대신 생수를 냉장고에 넣어주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재바르게 일 잘하는 지맥이 더 좋다는 분들도 많으세요.”

“그래, 내가 겨우 생수 두 병 배달시켰으니 그걸 냉장고에 갖다 넣어주기까지 하면 돈은 안 되겠지. 늙었어도 나도 그 정도는 안다구. 근데 말이야, 내가 냉장고에 넣어달라고 한 것도 아니거든? 그놈이 지가 쓱 들어와서 냉장고에 생수를 넣더니 말이야, 지 딴에 기분이 나빴는지 내 팔을 막 잡아 땡겼다고. 살짝 닿은 게 아니라. 내 증거가 있다니까.”

박영호는 나를 월패드로 데려가 현관 CCTV의 녹화된 영상을 보여줬다. 지맥 50439가 현관으로 생수병을 들고 들어와 집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50439가 끽끽거리는 소리와 박영호가 뭐라고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그게 다였다.

“선생님, 팔을 잡아끄는 것은 안 보이는데요?”

“이 안쪽에서 그랬지, 화면에는 안 보이지만. 소리가 들리잖아, 소리가.”

역시 참 편리하게도 현관 CCTV에서는 안 보이는 위치였다. 지맥 긴고아캠의 비디오만 있었어도 손쉽게 사실을 밝혔을 텐데, 긴고아캠은 프라이버시 때문에 댁내에서는 녹화를 멈춘다. 박영호는 그것까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뭐, 할머니가 아끼던 꽃병이라고? 솔직히 표정 연기는 그럴싸했다. 하지만 어떡하랴. 나는 거듭 사과하고, 무료 배달 쿠폰을 다섯 장 드리고, 보험사도 불러서 물질적, 정신적 피해도 보상하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또, 지맥이 왜 그랬는지 밝히기 위해 CCTV 영상도 복사해다 지맥의 소리를 분석해보겠다고 했다. 보상금 깎는 건 나보다 보험사 직원이 더 잘할 테고, 소리 분석은 개뿔이다.

그나저나 이 녀석은 사고치고 어디 갔을까. 나는 지맥의 키에 맞춰진 카트를 허리 숙여 끌며 아파트 주변을 돌았다. 덜컹거리는 소리에 동네 사람들이 나를 측은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이봐요, 난 관리자라고요. 지맥 대타하는 사람이 아니라.

50439는 쓰레기 집하장에 웅크리고 있었다.

“지맥 50439, 따라와.”

50439는 나를 알아보고 따라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50439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뭐든 명령하면, 50439의 이마에 부착된 긴고아가 그 말을 인식해서 태스크 코드로 바꾼 후, 내장 스피커로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두뇌에도 지시를 전달한다. 그렇게 설명서에 나와 있고, 평소 모든 지맥이 그런 식으로 반응했다. 그런데 50439의 긴고아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자세히 보니 상태등이 적색과 녹색으로 번갈아 점멸하고 있었다. 원래 업무 시간 중에는 녹색으로 계속 켜져 있어야 정상인데. 빨리 센터에 데려가서 관리 터미널로 상태를 확인해봐야 했다. 내가 빠른 걸음으로 가니 50439도 따라오기는 하는데, 다리를 절룩거린다. 아침에도 저랬었나? 박영호한테 발로 차였는지도 모른다.

배달센터로 돌아와 50439를 진료대에 앉혔다. 진료대라고 해봐야 지맥에게 예방 접종할 때나 쓰는, 그냥 보통 의자다. 50439는 얌전히 앉아 있었다. 나는 <Genetically-Enhanced Machine-Augmented Chimpanzee (GEMAC) 관리 매뉴얼>을 꺼냈다. 첫 페이지에는 개괄적인 설명이 나와 있다. 지맥이 생후 3개월이 되면 긴고아를 이마에 부착하고 고집적 전극으로 뇌와 직접 연결한다. 이때부터 긴고아는 뇌와 일체가 되어 역할을 분담하고 함께 학습 과정을 거친다. 물론 GIN-GOAH: GEMAC Interface Node - Graphene Optoelectronic Advanced Headband라는 어려운 약자는 지맥을 개발한 신텔리전스 사의 마케터들이 손오공의 머리띠인 긴고아(緊箍兒)에 발음을 맞추느라 억지로 지어낸 것이므로 내가 굳이 이해할 필요는 없다. 내가 봐야 하는 부분은 관리 터미널을 긴고아와 연결해서 지맥의 상태를 점검하는 방법. 처음 왔을 때 한번 훑어보긴 했는데, 필요할 때 다시 보면 되겠지 하는 생각에 대충 넘겼었다. 별 건 없었다. 터미널과 긴고아를 페어링시키니 긴고아와 지맥의 상태가 터미널 화면에 떴다.

시스템 상태: 안전_모드 [?]
태스크: 
    코드=택배_배달 [?]
    화물=[32226478], 목적지=[35562212]
    상태=일시_정지
        └ (+) (하위 태스크)
경고 메시지:
    1. 코드=W001023, 설명="기준치 이상 통증", 위치="우측 무릎", 반복_3개월=5

안전모드가 뭐지? 물음표 아이콘을 눌러보니 긴고아 소프트웨어가 비정상적인 상태를 감지하면 수행하던 태스크를 중지하고 안전모드로 진입한다고 되어 있다. 마지막 태스크의 상세 정보에 의하면 50439는 박영호의 집에 생수를 배달 중이었다. 정상적인 태스크를 수행하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안전모드로 바뀐 것이다. 우측 무릎의 통증이 기준치 이상이라는 메시지도 있었다. 이것 때문에 아까 다리를 절룩거렸던 모양인데, 이 정도의 증상은 무거운 물건을 배달하는 지맥에는 종종 발생하는 것이라고 들었다. 진통제와 소염제 좀 주고, 업무 배분 조절해서 며칠간 일 줄여주면 대개는 절로 낫는다. 물론 이것도 지맥이 로봇보다 유리한 점이었다. 그런데 관리 터미널에는 내가 이 일을 맡기 전부터 50439의 무릎 통증이 이미 다섯 번이나 발생한 것으로 나타나 있었다. 본사 지원실에 전화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관악센터의 우진인데요, 오늘 저희 지맥 하나가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무슨 문제였는데요?”

“고객 컴플레인이 있어서 가봤는데, 지맥이 팔을 잡아끌고 기물을 파손했다는 얘기를 들었고요, 지맥은 쓰레기 집하장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긴고아는 안전모드로 바뀌어 있었고요. 이 지맥은 최근에 무릎 통증도 여러 번 있었는데요, 새 지맥을 받을 수 없을까요?”

“고객 컴플레인은 어떻게 처리되었나요?”

“그건 제가 잘 설득해서, 보험사 연락하기로 하고 쿠폰 몇 장으로 막았습니다.”

“수고하셨고요, 관리 터미널에 ‘교체 대상’이라고 나오나요?”

“아니요, 그런 표시는 없습니다.”

“요즘 전사적으로 비용 절감 때문에 여유 지맥은 없습니다. 신텔리전스 사 고객센터에 직접 연락해서 지원받으세요. 수고하세요.”

역시 말단 직원에게 다 떠넘기는 것은 어디 가나 똑같다. 특히 여기는 수익성이 안 좋은 동네라서 더 찬밥인 것이 분명했다. 모르긴 해도 잘사는 동네 지맥은 더 팔팔하고 때깔도 좋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신텔리전스 고객지원입니다. 저희 신텔리전스는 증강 동물들의 권익을 위하여―”

“네, 저는 오공택배 관악배달센터의 김우진이라고 하는데요, 저희 지맥 하나가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세요. 렌트 계약 관련된 문제이면 ‘계약’, 지맥의 건강과 관련된 문제이면 ‘건강’―”

“긴고아가 안전모드로 되었습니다.”

“네, 긴고아가 안전모드로 진입했군요. 많이 불편하셨겠습니다. 긴고아는 정밀한 최첨단 장치로서 아주 드물게 오동작을 일으킬 수 있고, 그 경우 안전모드로 진입합니다. 물론, 이때도 지맥은 훈련받은 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습니다. 먼저 긴고아의 펌웨어가 최신 버전인지 다시 한번 확인해주시고, 안전모드를 해제하기 위하여 긴고아를 리셋하는 방법을 들으시려면 ‘리셋’, 같은 증상이 최근 한 달 이내에 세 번 이상 발생했다면 ‘반복 문제’라고 말씀해주세요.”

혹시나 해서 다시 봤지만, 관리 터미널에는 50439의 펌웨어가 업데이트할 것이 없다고 나타나 있었다. 신텔리전스 고객지원에서 시키는 대로 긴고아를 리셋했다. 잠시 후 50439는 아침에 봤던 정상 상태로 돌아왔다. 오늘은 어차피 더 시킬 일이 없었다.

“50439, 숙소로 가서 쉬어.”

“네, 알겠습니다.”

긴고아의 스피커가 바로 대답하고, 50439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숙소로 올라갔다. 하지만 나도 그런 표정 지으며 퇴근하려면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박영호 컴플레인 건 등 잡다한 업무기록을 일지에 입력하고, 보험사에도 메일 보내놓고, 신텔리전스에서 새로 릴리즈한 교육 콘텐츠를 지맥 수면교육 시스템에 다운로드했다. 이 콘텐츠로 지맥의 긴고아와 뇌가 렘(REM)수면 사이클 동안 함께 학습된다. 마지막으로 2층의 지맥 숙소에 갔다. 거주 환경이 쾌적한지, 몸이 아픈 지맥은 없는지, 지맥끼리 잘 어울리는지 매일 기록해야만 했다. 이건 신텔리전스가 취합해서 동물권 협회에 의무적으로 제출하는 것이다.

신텔리전스는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들을 살리려면 소위 ’증강 동물’화, 즉 유전자 조작과 긴고아로 이들의 능력을 증강시켜 인간 사회에서 쓸모 있게 만드는 것이 현실적인 해결책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기까지 동물권 협회를 비롯한 시민단체의 온갖 까다로운 요구를 만족시켜야 했고, 내가 귀찮은 서류작업에 시달려야 하는 이유였다.

지맥들은 모두 배달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서로 털을 골라주면서 끽끽거리며 어울려 놀고 있었다. 그런데 50439는 한쪽 구석에서 혼자 오락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의기소침한 것도 당연했다. 항상 해야 할 일을 알려주고 사람이나 다른 지맥과의 대화도 도와주던 긴고아가 꺼진 상황에서 무서운 노인이 떠밀고 소리를 질러 댔으니.

“지맥, 오늘 수고들 많았어. 나는 퇴근할게. 다들 편히 쉬고 잘 자.”

“우진 대장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지맥의 스피커들이 다 같이 합창했다. 내 별명을 관리 터미널에 설정한 이후 지맥들에게 나는 대장이었다.


다음 날 아침, 지맥들은 배송 트럭이 싣고 온 화물의 분류 작업을 하고 있었다. 서로 무선으로 통신하는 긴고아들이 각 지맥을 마치 하나의 컨베이어 벨트에 연동된 기계처럼 일사불란하게 제어했다. 수천 개의 화물은 물 흐르듯 순식간에 각 카트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50439는 이 작업에 끼지 못하고 다른 지맥들이 따로 빼놓은 화물을 혼자서 왔다 갔다 하며 자신의 카트에 싣고 있었다. 어제 긴고아를 리셋한 후 무선 채널이라던가 뭔가 설정이 달라진 걸까? 화물 분류 작업을 자세히 관찰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어서 예전에도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결국 50439는 마지막으로 카트를 끌고 배달센터를 나섰다.

오전 업무를 겨우 마무리할 무렵, 전화가 왔다. 어제 컴플레인했던 박영호였다. 보험사하고 얘기가 잘 안 됐나?

“야 이놈아, 내가 어제 그 원숭이한테 문제 있다고 그랬잖아!”

“네? 이놈 저놈 하지 마시고요, 선생님. 무슨 일이신데요?”

“내가 지금 화 안 나게 생겼어? 이놈이 나를 또 잡아끌잖아.”

“그럴 리가 없는데요? 선생님 댁에는 다른 지맥을 보내드렸어요.”

분명히 어제 업무 관리 화면에서 박영호의 집에는 50439가 다시 배달 가지 않도록 예외 설정을 해 뒀었다.

“아냐, 어제 그놈 맞아. 내가 이 쭈글쭈글한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고. 시니어 센터 가는데 이놈이 내 앞에 나타나더니만 나를 또 잡아끄는 거야.”

“네? 길에서요? 거기가 지금 어디 신가요? 당장 가겠습니다.”

“그래. 당장 오지 않으면 내 이놈의 원숭이를 때려잡을 거니까. 그리고 이번에는 그딴 싸구려 쿠폰 같은 거로 때울 생각은 하지도 마!”

사고가 발생한 곳은 박영호의 아파트에서 별로 멀지 않은, 시니어 센터로 가는 골목길이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까지도 50439는 박영호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아이고 선생님, 죄송합니다. 정말로 저 녀석이 맞네요. 혹시 어디 다치지는 않으셨어요?”

“내가 왜 다쳐? 내가 지금은 이래 보여도 말이야, 젊었을 때는 한가락 했었다고. 그래, 그나마 나니까 인명 사고 안 났지. 대신 저 원숭이는 오늘 나한테 죽었어.”

박영호는 지팡이를 휘두르며 50439에게 다가갔다. 50439는 겁먹은 표정으로 물러섰지만 멀리 도망가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행히 박영호도 50439를 진짜로 때리지는 않고 시늉만 했다. 설령 때리더라도 지맥이 반격하지 못한다는 것까지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휴, 제발 진정 좀 하시고요. 이번에는 제가 직접 봤으니까 본사에 연락해서 선생님이 피해 보상 확실히 받으실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일단은 제가 얘를 좀 데려가고요.”

주변에서 이 장면을 구경하던 사람 중 한 명은 휴대폰으로 촬영하고 있었다. 빨리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50439, 가자.”

50439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을뿐더러, 어제와 달리 내가 배달센터 쪽으로 걸어가도 따라오지도 않았다.

“지맥 50439, 나를 따라와.”

다시 지시해도 50439는 박영호 부근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박영호는 다시 지팡이를 들어 올리고, 구경꾼도 더 모이고 있었다. 비상 상황이었다. 혹시나 해서 들고나온 긴고아 리모컨을 꺼내 빨간 버튼을 눌렀다. 설명서에서 읽어본 후 처음으로 써보는 기능이었다. 음성 안내가 나왔다.

“긴고아 긴급 통제 기능은 동물권 협회의 엄격한 기준을 준수해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먼저, 관리자의 소속과 이름 그리고 이 기능을 이용해야 하는 상황을 간략히 말씀해주십시오.”

“오공택배 관악배달센터 김우진, 지맥 50439가 명령을 듣지 않고 고객을 불편하게 하고 있습니다.”

구경꾼이 휴대폰으로 촬영 중이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긴고아 리모컨의 이 녹음은 모두 기록으로 남게 된다. 함부로 ‘고객을 위협’ 같은 표현은 사용하면 안 된다.

“지맥 50439의 긴고아와 연결되었습니다. 이 기능은 각 지맥에 대해 제한된 횟수 내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으며, 한번 사용하실 때마다 계약사에는 소정의 동물보호 기금을 납부하실 의무가 부과됩니다. 그래도 사용을 원하시면 적색 버튼을 3초 이상 눌러 주십시오.”

나는 빨간 버튼을 길게 눌렀다. 관리지침에 의하면 본사에 연락해서 허락을 받아야 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꺅― 꺄꺅―”

50439가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고통스러워했다. 이 기능이 지맥에게 고통의 감각을 발생시킬 뿐, 다치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팠다.

“50439, 나를 따라와.”

50439는 나와 박영호를 번갈아 쳐다보며 주저했다. 나는 50439를 노려본 후, 리모컨의 빨간 버튼에 다시 손가락을 올려 누르는 시늉을 했다. 50439는 체념한 표정으로 나를 따라 배달센터로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는 박영호가 고소할 거라는 둥 소리치며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이 원숭이와 싸운 무용담을 자랑하고 있었다. 50439는 자꾸 뒤를 돌아보면서도 나를 따라왔다.

배달센터로 돌아온 후, 본사 팀장에게 전화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고했다. 팀장은 승인 없이 리모컨을 사용한 것을 포함해서, 모두 내 책임이라며 빨리 해결하라고 난리였다. 나는 50439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밝혀내어 내 책임이 없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해야만 했다.

“안녕하세요, 신텔리전스 고객―”

“상담원 연결해주세요. 긴급상황입니다.”

한참 기다렸다.

“오래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담원 오지연입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저희 지맥이 명령을 듣지 않고 사람을 위협했습니다.”

“네, 뭐라고요? 절대로 그럴 리 없습니다. 저희 지맥은 유전자 공학에 의해 폭력성을―”

“어제 택배 배달 중에 고객의 팔을 잡아끌었다는 컴플레인이 있었는데 그때는 저도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같은 고객에게 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제가 가봤더니, 지맥이 제 명령을 거부하고 그 고객의 주위를 계속 맴돌았습니다. 두 번 모두 긴고아에서는 적색과 녹색불이 번갈아 점등했고요, 아무래도 긴고아가 고장 난 것 같습니다.”

“긴고아가 고장 나더라도 지맥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는 않습니다만, 일단 긴고아의 일련번호를 알려주세요.”

나는 관리 터미널 화면에 보이는 18자리 숫자를 불러줬다.

“아, 레트로핏 모델이네요.”

“네? 레트로 뭐라고요?”

“레트로핏된 지맥입니다. 지맥이 어렸을 때 훈련받은 업무가 아니라, 긴고아 소프트웨어의 변경과 재훈련을 통해 다른 업무를 수행하게 된 지맥입니다. 이런 지맥은 제가 도와 드릴 수 없고요, 저희 레트로핏 센터의 담당자가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후 전화가 왔다. 레트로핏 센터의 이수연이라고 자신을 밝혔다.

“접수된 케이스를 확인했는데요, 말씀하신 50439는 원래 노인 케어용으로 훈련되었다가 택배용으로 레트로핏된 지맥입니다.”

“노인 케어요? 지맥이 그런 일도 하나요?”

수연에 의하면 그녀가 신텔리전스에 입사하기 한참 전, 지맥 개발 초창기에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돌보는 노인 케어 지맥이 개발되었다. 하지만 베타 서비스의 반응이 좋지 않아서 프로젝트는 취소되었고, 당시의 지맥들은 다른 용도로 재활용, 즉 레트로핏 되었다. 나는 지맥 50439가 노인을 잡아끌고 주위를 맴돌았던 사건을 설명했다.

“이상하네요. 레트로핏이건 아니건 그런 일이 일어날 리는 없는데요. 긴고아에 직접 디버거를 연결해서 자세한 로그를 분석해봐야겠습니다. 지맥 50439의 긴고아는 메모리 용량이 부족해서 레트로핏 하면서 원격 디버깅 기능을 빼버렸기 때문에 현장에서 유선으로 연결해야 합니다. 제가 그쪽으로 바로 방문 드리겠습니다.”

수연이 방문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인터넷을 봤더니 벌써 아까의 소동을 찍은 동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박영호가 흥분한 목소리로 인터뷰하는 모습에 주변을 맴도는 50439의 모습이 교묘하게 편집되어 덩치도 실제보다 커 보이고 마치 박영호를 정말로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다. 댓글이 쉴새 없이 달리며 조회수가 올라가고 있었다. 뉴스 사이트에는 신텔리전스 사의 성명도 올라와 있었다.

‘지맥은 절대로 안전하며, 정확한 상황은 파악 중이나 혹시 조금이라도 부적절한 행동을 한 지맥이 있었다면 절차에 따라 엄중하게 관리될 것임’

배달센터 앞을 보여주는 CCTV 화면에는 피켓을 든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폭행 지맥 처단’, ‘GEMAC OUT!’, ‘사람 잡는 지맥’, ‘일자리 뺏어가는 지맥 반대’ 등, 폭행 얘기 말고는 흔히 보는 구호들이었다. 시위대 사이로 대략 내 또래의 여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인터컴 카메라에 신분증을 보여줬다. 신텔리전스의 수연이었다. 출입문을 열어 잽싸게 수연을 안으로 들인 후 50439에게 데려갔다. 그녀는 가방에서 태블릿같이 생긴 장치를 꺼내 능숙한 솜씨로 50439의 긴고아와 케이블로 연결했다. 그녀가 장치를 조작하자 50439는 눈을 감았다.

“지맥은 사람을 위협하지 못하지만, 혹시나 해서 포터블 터미널로 지맥을 진정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말씀하신 사건이 어제 정확히 몇 시에 일어난 일인지 아시나요?”

나는 박영호와의 통화 기록을 뒤져 대략의 시간을 알려줬다. 수연은 포터블 터미널을 조작하며 빠르게 흘러가는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지금 긴고아의 디버깅 로그를 보고 있는데요, 그때 기록이…, 아, 여기 있네요. 목적지에 잘 도착했고, 초인종을 누르고, 물건을 냉장고에 넣고, 어, 그다음 부분이 이상한데요. 긴고아가 50439의 뇌에서 뭔가 감지했는데 처음 보는 이벤트 타입이에요.”

“이벤트 타입이요? 그게 뭔데요?”

“지맥이 업무 수행 중에 예상 못 한 상황, 예를 들어 장애물과 마주쳤다던가, 어딜 다쳤다던가 그럴 때 뇌의 반응을 긴고아가 인식해서 그 상황에 해당하는 이벤트를 생성해요. 그런데 이 이벤트는 제가 처음 보는 종류이고 긴고아에 그걸 어떻게 처리할지 정의되어 있지도 않아서 안전모드가 되었어요. 레트로핏 되기 전의 소스 코드를 보고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녀는 휴대용 컴퓨터를 꺼내더니 내게는 전혀 이해 안 되는 복잡한 화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CCTV 화면으로 시위대가 점점 불어나는 것을 초조하게 보고 있었다. 잠시 후 수연이 고개를 들었다.

“알았어요! 50439는 노인을 위협한 게 아니었어요. 그게 아니라 신장이었어요, 신장.”

“네? 신장이라니요?”

“50439가 원래는 노인 케어용 지맥이었다고 했잖아요. 어려서 학습한 업무 중에는 노인들 몸의 이상 징후를 감지해서 필요한 조처를 하는 것이 있었어요. 그중의 하나가 노인의 입에서 암모니아 냄새가 나면 병원에 데려가 신장에 문제가 있는지 검사받는 것이었고요.”

“암모니아 냄새, 그게 신장이 안 좋으면 나는 건가요? 어떤 냄새인데요?”

“쉽게 말하면 화장실 냄새죠. 신장이 몸의 암모니아를 분해해야 하는데, 신장 기능이 저하되면 입에서 그런 냄새가 날 수 있대요.”

“그러고 보니 그 노인 입 냄새가 고약하기는 했어요. 그런데 왜 긴고아가 관리자인 저한테 알리거나 노인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을까요?”

“이 레트로핏된 소프트웨어에는 그런 기능이 없어요. 옛날에 잠시 노인 케어 서비스를 실시할 때 이후로는 지맥에게 그런 역할이 부여된 적이 없고, 관련 이벤트를 처리하는 기능도 다 빠졌어요.”

“긴고아가 생성한 이벤트라면서요. 그런데 왜 그걸 처리하는 기능은 없어요?”

“긴고아에서 뇌의 반응을 인식하는 모듈은 어린 지맥의 뇌와 결합하는 순간부터 그 뇌에 맞춰 학습되거든요. 그 모듈은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하거나 레트로핏할 때도 안 건드려요. 그래서 뇌 반응 인식 모듈에서 옛날에만 쓰던 이벤트가 발생했는데,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는 레트로핏된 소프트웨어가 안전모드가 된 거예요.”

“그러고는 지맥이 예전에 훈련받은 대로 노인을 병원에 데려가려 했다는 거죠? 그런데 그러면 다른 레트로핏된 지맥도 그런 문제가 자주 발생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왜 50439만 문제가 된 거죠?”

“그게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에요. 주인을 병원에 데려가려 했던 것은 틀림없는데, 레트로핏된 지맥이 꽤 많지만 이런 일은 지금까지 없었거든요.”

“’주인’이라고요? 지맥은 모두 렌트하는 것 아니었나요?”

“렌트 계약 맞고요. 노인 케어 지맥은 한 명의 노인하고만 지속적인 정서적 관계를 갖게 되어 있었어요. 그 사람을 편의상 주인이라고 했었고요.”

나는 박영호에게 전화했다. 아무리 진상 노인이라도 병원에 가보시라는 말씀은 드려야 했다.

“그러니까 그 원숭이가 내 입 냄새가 불쾌해서 병원 데려다 고치려 했다 이거야?”

“아니요, 선생님. 그게 아니라 입에서 그런 냄새가 나는 건 혹시라도 신장이―”

“그러니까 나한테서 퀘퀘한 입 냄새가 난다는 거 아냐.”

“네, 그러니까 그런 냄새가 나는 건, 신장에서―”

“내가 시니어 센터 할머니들한테 얼마나 인기 있는지 알아? 내 입에서 썩은 내가 나면 그럴 리 있겠어? 뭐 내가 고소하겠다고 하니까 쫄려서 얘기를 지어내려는 것 같은데, 와서 엎드려 빌어야지 뭐 입 냄새 땜에 원숭이가 날 잡아끌었다고? 됐으니까 법정에서 보자고.”

이번에도 말꼬리를 잡히고야 말았다.

“박 선생님이 도통 말을 안 들으시네요. 뭐, 저는 일단 말씀은 드렸으니 그다음은 아프거나 말거나, 자기 책임이죠, 뭐.”

내 말을 듣는 수연의 표정이 안 좋았다.

“아니, 그러니까 내일쯤 진정되시면 제가 다시 한번 전화를 드려서―”

“그게 아니고요. 50439 말이에요. 전화하시는 동안 옛날 파일 서버를 뒤져서 50439의 개별 관리 파일을 찾았어요. 그런데,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그때는 지금의 지맥 관리 기준이 만들어지기 전이었거든요.”

“무슨 말씀이신지…”

“50439는 초기 모델이었어요. 그러니까 지금 스무살 정도 되었어요.”

“그 정도면 아직 한참 더 일할 수 있는 거죠? 사람만큼은 아니어도 침팬지도 꽤 오래 사는 거로 설명서에서 본 것 같은데요.”

“맞아요. 그런데, 관리 파일을 보니까 50439는 텔로미어를 단축하는 크리스퍼 시술이 되어 있었어요. 유전자 편집으로 수명을 단축시킨 거예요.”

“아니, 왜요?”

“새로운 모델을 개발할 때는 여러 번의 개발-시험-수정 사이클을 거쳐야 하는데, 최적화되지 않은 모델이 수명만 길면 부담스럽거든요. 어릴 때 가속 성장 프로세스를 적용하면 라이프 사이클 후반부에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하고요.”

“감정이 있는 동물을 마치 무슨 전자 제품처럼 말씀하시네요.”

“죄송해요. 저도 회사에서 쓰는 표현에 익숙해지다 보니….”

수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니, 수연 님을 뭐라는 게 아니라…. 그러면 50439가 요즘 계속 무릎이 안 좋던데 그것도―”

“네, 노화가 시작되어서 그래요.”

나도 코끝이 찡해졌다. 옆에 조용히 눈 감고 앉아 있는 50439를 쳐다봤다. 어쩐지 얼굴에 주름이 많아 보였다. 이틀 사이에 부쩍 더.

수연은 아무 말 없이 50439의 진정 모드를 해제했다. 50439는 눈을 뜨고 나와 수연을 번갈아 쳐다봤다. 수연은 긴고아에서 케이블을 분리했다.

“50439가 다른 지맥들과 어울리지 못하던데, 그것도 관련이 있나요?”

“50439의 긴고아가 용량이 부족해서 그래요. 구형 긴고아용 레트로핏 소프트웨어는 최신 긴고아용보다 버전도 낮고 기능도 몇 가지가 빠져 있어요. 자기네끼리 통신하는 프로토콜도 버전이 낮아서 어휘가 부족해요.”

난 지맥 관리자면서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다. 스무살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노화가 시작되었고, 세대 차이로 다른 지맥에게 따돌림당하는 녀석이었다니. 50439를 차마 마주 쳐다볼 수 없었다.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다가 수연의 컴퓨터 화면을 봤다.

“저기, 저 문서의 사진은 누구예요?”

“이거요? 50439의 노인 케어 프로그램을 평가한 내용이에요. 이 사진은 그때 주인이었던 분이세요.”

“이럴 수가.”

“왜요?”

“그 분이네요. 박영호 선생님.”

“네? 이분은 베타 테스트 종료 후 곧 돌아가셨다고 나와 있는데요? 누구 말씀하시는 거예요?”

“50439에 대해 컴플레인했던 그 노인분이요. 똑같이 생겼어요. 얼굴이.”

나는 박영호의 아파트에서 복사해온 현관 CCTV 비디오를 보여줬다.

“정말 닮았네요.”

“50439가 혼동한 거죠? 옛날 주인이랑?”

“그런 것 같아요. 옛날 주인과 닮은 얼굴이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렸나 봐요. 그게 지금까지 다른 레트로핏 지맥에게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던 이유였어요. 이만큼 닮은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는 않으니까. 아마 주인을 만났다고 생각한 50439가 반갑다는 자기 나름의 의사 표현도 했을 텐데, 레트로핏된 긴고아가 우리 말로 전달을 못 했을 거예요.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그때 갑자기 쨍그랑 소리가 나며 돌멩이가 사무실 안에 떨어졌다. 깨진 환기창으로 시위대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CCTV 모니터를 보니 지맥 몇이 웅크리고 모여앉아 있고, 배달센터의 출입문 앞을 막아선 시위대는 이들에게 피켓을 휘두르며 야유를 보내고 있었다.

“큰일 났어요. 배달 갔다 돌아오던 지맥들이 시위대한테 몰렸어요.” 내가 말했다.

“저는 회사에 빨리 이 사건의 분석 결과를 알릴게요. 회사에서 진실을 발표해야 해요.”

“저는 그러면 경찰에 전화해서 시위대를 좀 막아달라고 하겠습니다.”

“지맥이 사람을 폭행하고, 시위대가 지맥하고 대치했다고요?”

“폭행했다는 건 오해였고요, 대치가 아니라 지맥들이 일방적으로 몰려있어요. 저도 이 안에 갇혀 있는데 시위대가 돌멩이도 던지고 폭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빨리 좀 와주세요.”

“죄송하지만 저희는 관여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네? 와서 불법 시위대를 해산시키셔야죠.”

“오해라고 하셨지만, 아직 진상이 확실치도 않은데 저희가 함부로 회사 편을 들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동물과 사람이 대치하고 있으면 동물을 다룰 수 있는 전담 인력이 출동해야 하는데 지금 다른 데 나가 있거든요.”

“그래서 신텔리전스 사에선 뭐라 그래요? 경찰은 엮이기 싫다는데, 회사에서 경호원이나 누구 좀 보내줄 수 없을까요?”

수연이 돌아섰을 때, 그녀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다.

“회사에서는 알겠다고, 그 내용으로 정리해서 언론에 발표하겠대요.”

“그럼 잘된 거잖아요.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런데요, 어쨌거나 50439가 과거의 기억 때문에 예상치 못한 행동으로 노인을 놀라게 한 것은 <심각> 레벨의 오동작이래요. 그런 지맥은 폐기할 수밖에 없대요.”

“폐기요? 폐기가 어떻게 한다는 거예요?”

“안락사 말이에요.”

“네? 오동작 한 번 했다고, 그것도 사실 오동작도 아닌데 죽인다고요?”

“제가 긴고아의 소프트웨어를 수정해서 예전 이벤트 코드에 대한 예외처리를 추가하면 안 되겠냐고 제안도 해봤어요. 하지만 다양한 케이스를 다 다시 검증하고 품질 보증 과정을 거치려면 너무 비용이 많이 들어서 어쩔 수 없대요.”

“동물권 협회는 이럴 땐 가만있어요?”

“그것도 알아봤는데, 합의된 예외 조건에 해당하나 봐요. 원래 일을 못 하게 된 지맥은 예전 비무장지대에 조성된 보호구역으로 보내는데, 안전 문제 때문에 <심각> 레벨의 오동작을 일으킨 지맥은 못 보낸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평생 일 안 시키고 가둬둘 수도 없고요.”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수연은 50439에게 다가가 그를 껴안았다. 50439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곧 그녀를 껴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때 전화가 왔다.

“저기, 난데. 박영호. 그 원숭이가 잡아끌었던 사람.”

“네, 선생님, 목소리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목소리로는 누군지 모를뻔했다. 그동안의 화나고 기세등등한 박영호가 아니었다.

“내가 좀 미안하게 됐네 그려. 아까 전화 끊고 찜찜해서 병원에 가봤거든. 의사가 급성 신부전증이라고, 당장 내일부터 치료 시작하자는 거야.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면서. 그러니까 그 원숭이 덕에 내가 산 거지.”

“잘됐네요.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었는데요. 그런데요, 선생님.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나는 50439가 원래 케어용 지맥이었는데 예전에 케어하던 주인과 박영호가 얼굴이 비슷해서 착각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쩐지 처음 현관에 들어올 때부터 좀 이상하게 굴더라니, 나를 지 주인이라고 생각했었구먼.”

“그랬던 것 같습니다.”

“허, 참. 내가 또 바보짓 했어. 우리 애들이 지 엄마 기침 소리가 안 좋은 것 같다고 했을 때도, 난 그냥 감기 갖고 뭔 야단이냐고 우겼거든. 그러다 뒤늦게 병원에 데려갔더니 급성 폐렴이라고…. 그래놓고 또 우겼으니 이번에는 내가 그냥 신장병으로 갔어야 했는데….”

“선생님, 이번에는 오해하실 만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 녀석이 시킨 대로 병원 가셨잖아요.”

“그러게. 그러니까 늙으면 젊은 사람 말도 좀 들어야 하는데 말이야.”

“사실, 이 녀석도 그리 젊지는 않습니다.”

난 이 말을 무심코 꺼낸 것을 후회했지만, 50439의 생체 나이에 관해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박영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내가 자네하고 그 원숭이한테 어제부터 좀 심하게 한 거 같아서 말이야, 둘이 함께 먹으라고 바나나 한 다발 사갖고 지금 그 센터로 가던 길인데.”

“아, 그러셨어요? 저도 배달센터에 있는데요, 지금 여기는 시위대 때문에 위험합니다. 댁으로 돌아가 계세요.”

“그니까 내가 지금 바로 그 앞에 있는데, 시위대가 말이여, 걔가 나한테 뭐 나쁘게 한 줄 알고 그러는 거지?”

“네, 그게 발단이긴 한데, 평소에 지맥을 싫어하던 사람들입니다. 일자리 뺏었다고요.”

“아니 지네들은 그 돈 받고 그 일은 하지도 않을 거면서. 나 때는 말이야, 그때도 외국인 노동자나 FTA 때문에 일자리 없어진다고 말들 많았지만 그게 반대한다고 되나? 자기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지. 얘들이 우리 대신 궂은 일 하는 거잖아. 내가 사람들한테 한마디 좀 해야겠네.”

“아니요, 선생님, 그러시면 위험―”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CCTV를 봤다. 박영호가 시위대 앞에서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시위대가 다시 야유하고, 박영호가 또 뭐라고 하고. 나야 박영호의 훈계를 참고 들어줄 수밖에 없었지만, 시위대는 그러지 않았다. 박영호가 화를 내는 모습으로 시위대에 더 가까이 다가서자 시위대가 박영호의 멱살을 붙잡고 몸싸움이 시작됐다.

갑자기 타다닥 발소리에 이어 문이 철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의 더운 바람이 들어왔다.

“50439가 CCTV를 보더니, 순식간에…. 잡을 새가 없었어요.” 수연이 말했다.

나도 밖으로 뛰어나갔다. 50439는 시위대와 박영호의 사이로 끼어들어 둘을 떼어놓으려 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상황 판단을 못 한 시위대는 박영호한테서 떨어졌지만, 곧 50439를 알아봤다.

“저놈이다! 그 동영상에 나온 놈. 저 폭행 지맥!”

사람들이 50439를 둘러싸고 피켓으로 내려치기 시작했다. 50439는 쪼그리고 앉아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안 돼!”

나는 소리치며 50439를 둘러싸고 있는 시위대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 그를 감쌌다. 그래도 시위대는 멈추지 않았다. 나와 50439는 함께 피켓에 얻어맞고 있었다.

“꺅, 꺅꺅, 우우욱, 꺄갹―”

시위대를 피해 멀리 가 있던 지맥들이 일제히 뛰어와 사람들 머리를 타고 넘어 나와 50439를 둘러쌌다. 사람들은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시위대의 손에는 여전히 피켓이 들려 있었고, 잠시 놀랐던 표정은 더욱 화난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제 나와 박영호, 50439와 동료들이 한 편이 되어 반대편의 시위대에 맞서 팽팽히 대립하고 있었다. 하지만 감히 사람에게 대들지 못하는 지맥과 지팡이에 의지하는 박영호를 제외하면 나 하나뿐이었으니 승산이 전혀 없었다.

“진정들 하시고요, 오해하신 거예요. 지맥은 이분을 도우려고 했던 겁니다.” 내가 말했다.

“뭐? 너도 그 회사 직원이잖아. 거짓말하지 마.”

사람들이 나와 지맥이 입고 있는, 손오공이 구름 타고 택배 배달하는 그림이 그려진 회사 티셔츠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오공택배 유니폼을 싫어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경고합니다. 다들 해산하세요.”

갑자기 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배달센터 문에서 포터블 터미널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하필이면 신텔리전스 로고가 있는 모자를 쓰고.

“해산 안 하면 어쩔 건데?”

시위대 앞줄의 남자가 물었다.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수연은 포터블 터미널을 보란 듯이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 지맥들을 전투 모드로 바꿀 거에요. 영장류 보호 협약 5조 3항의 자위권 발동 조항에 의거해서.”

그런 게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시위대도 알 텐데.

“그런 게 어딨어? 지맥이 무슨 전투 로봇이냐?”

“모르시는군요. 이 지맥들은 전쟁 나면 전방으로 차출됩니다. 전투 훈련도 다 받았고요. 이 버튼만 누르면 목숨 내놓고 싸우는 지맥들하고 한번 붙어 볼래요?”

사람들이 흠칫거렸으나 물러서지는 않았다. 나는 수연을 돌아보며 어쩔 거냐는 표정을 지었다. 수연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그녀가 포터블 터미널을 조작했다.

지맥들이 일제히 헤쳐모여 2열 횡대 대형을 이뤘다. 앞열의 지맥들은 주먹 쥔 손으로 땅을 짚고 엎드리고, 뒷열의 지맥들은 차려자세를 취했다.

다시 수연이 포터블 터미널을 조작했다.

이번에는 지맥들이 삼각 대형으로 헤쳐 모였다. 굳게 뭉친 주먹 하나는 앞으로 내밀고, 다른 하나는 머리 위로 들었다.

그녀가 다시 한번 터미널을 조작하자, 지맥들이 일제히 큰 소리를 질러댔다.

시위대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재밌었죠?” 수연이 말했다.

“아니, 어떻게…. 정말 전쟁 나면 얘네들이 나가 싸우나요?” 내가 물었다. 수연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지맥 보육센터 졸업 공연용 태스크 코드를 활용했어요. 제가 나름 잘 연출하지 않았어요?”

나와 박영호는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못 했다. 지맥들은 뭘 아는지 자기네끼리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이번에는 50439도 함께였다. 어쩌면 보육센터 때 추억이 생각난 건지도 몰랐다.

골목 어귀에서 트럭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신텔리전스 로고가 크게 그려져 있었다.

“50439를 데려갈 차량인가 봐요.” 수연이 말했다.

“얘를 어디로 데려가는데?” 박영호가 물었다.

나와 수연은 박영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난처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박영호는 굳은 표정으로 트럭을 노려봤다. 트럭에서 내린 남자들이 다가왔다.

“아, 그 동영상의 할아버지시네요. 저희 지맥이 불편을 끼쳐 죄송합니다. 이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가 지맥을 데려가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심리적 피해 보상에 대해서는 저희 회사의 컨슈머팀에서 따로 연락을―”

“이 녀석을 어디로 데려다 뭘 어쩐다는 거요?”

“관련 규정에 따라 폐기할 예정입니다.”

“폐기? 폐기가 뭐 어쩌는 건데?”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신속하게 안락사―”

“뭐? 안락사? 얘가 뭘 잘못했다고?”

“잘못했다기보다는 정해진 대로 동작하지 않고―”

“아니, 뭔소리여. 내가 설명 들어보니 당신들이 얘한테 이거 시켰다 저거 시켰다 그래서 얘가 예전에 배웠던 대로 한 거라던데.”

“그게 지맥을 사람처럼 생각하시면 안 되고요, 철저한 품질관리하에 규정대로―”

“아니, 지금 얘가 나를 두 번 구했는데, 한 번은 신장병. 또 한 번은 시위대한테서. 그런 애를 불량품이라는 거야? 나를 구했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

“당신들 말이야, 뭐 돈 좀 있고 기술 좀 있다고 이렇게 감정이 있는 동물 갖고 맘대로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알겠어? 얘 이름이 상구랬지? 오공사 소속 상구. 상구는 내일부터 내가 신장 치료받는 걸 도울 거야.”

“네? 상구요? 선생님, 그건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게―”

“제가 긴고아에 오리지널 노인 케어 소프트웨어를 설치하면 돼요. 그때도 기능은 잘 동작했었어요. 사업성이 없어서 베타 테스트로 종료했지만, 충분히 어르신을 도울 수 있어요.” 수연이 끼어들었다.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수연을 노려봤다.

“거봐, 여기 똑똑한 연구원 양반이 된다잖아. 니들이 뭘 알아? 이 양반은 천재라고, 천재. 내가 조금 전에 똑똑히 봤다구.”

“아니, 그건 기술적인 얘기고 회사에는 절차가―”

“뭔 절차 같은 소리 하고 있어. 내가 말이야, 최고의 변호사하고 방송국 높은 사람을 잘 알거든. 내 말대로 안 해주면 그 동영상뿐만 아니라 아까 시위대한테 맞아 죽을 뻔한 것까지 다 문제 삼을 거라고. 못 믿겠지, 응?”

박영호가 휴대폰을 꺼내더니 3자 영상통화로 두 사람을 불렀다. 그건 나도 할 줄 모르는 기능이었는데.

“얘들아, 니 아빠다.”

“아니, 아버지, 요즘 좀 괜찮으세요? 안 그래도 저희가 한번 찾아뵈려고—”

“난 괜찮다. 그 얘기는 있다가 하고, 여기 이 사람들한테 너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얘기 좀 해줘라.”

박영호는 정말로 변호사와 방송사 간부를 잘 알고 있었다.


“상구가 박영호 선생님과 지낼 수 있게 됐어요.”

수연이 배달센터로 들어오며 말했다. 나는 각 지맥의 별명을 관리 터미널에 입력하던 중이었다.

“대신 제안하신 대로 정기적으로 여기 와서 우진 님의 관리를 받아야 해요. 저도 그때마다 들러서 오리지널 소프트웨어가 잘 동작하고 있는지 모니터링할 거고요. 그거 아세요? 이번 사건을 계기로 회사에서 노인 케어 프로그램을 다시 살리는 걸 검토한대요.”

“정말 잘됐네요. 그런데…”

나는 지난 며칠간 수연이 회사에 이 조건을 관철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눈총받고 고생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차마 마저 물어볼 수 없었다.

“뭘 물어보시려는지 알아요. 네, 노화를 되돌릴 수는 없어요. 앞으로 남은 기간도 예측하기 어렵고요. 하지만 상구는 우리하고 박영호 선생님과 함께, 자신의 짧은 삶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낼 거예요.”

수연이 내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도 미소 지었다. 그래, 살다 보면 그거면 충분하다고 믿어야 할 때가 있는 거다.

우리는 함께 상구를 만나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