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차량은 없다

커버

“형님, 이제 그 차 부품은 중고도 구할 수 없어요. 저도 정비소 폐업하려고요.”

박 사장의 말에 화가 나서 전화기를 집어던져 버렸다. 내가 자동차 회사 다닐 때 밑에서 일하던 녀석이었다. 차량 전동화로 인한 구조조정 때 같이 회사를 나왔고,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내 오래된 차를 수리해 주는 정비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럼 내 차는 어쩌라고? 직장 선배이자 단골인 나에게 그렇게 무책임해도 되나? 다시 전화해서 욕이라도 해 주려 했지만, 전화기가 산산조각 난 후였다. 이게 다 전기차만 타는 놈들 때문이다.

“노벗, 이제 더는 못 참아. 안전한 차를 탈 권리를 지키고 멍청한 놈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줄 거야.”

‘로봇’ 아니냐고? 나라에서 나 같은 노인에게 그런 비싼 기계를 줄 리 있겠어? 이 녀석은 ‘노인의 벗,’ 옷깃에 달고 다니는 AI이다. 이름부터 후진 데다 멍청하고 고집도 세다. 그래도 나를 내가 원하는 이름으로 불러주니까 반납하지는 않았다.

“조지 클루니 형님, 저는 인공지능으로서 위험한 일은 도울 수 없습니다.”

“위험하긴 전기차가 위험하지. 나는 그걸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거야.”

“통계에 의하면 전기차는 매우 안전합니다. 전기차의 화재 발생 빈도는….”

“나한테 일어나면 내게는 백퍼잖아? 넌 AI이면서 확률의 기본 정리도 모르냐? 베이스(base), 우리말로 기본 정리 말이야.”

“베이즈(Bayes) 정리1는 그런 게 아닌데요? 베이즈 정리에 대해 설명드릴까요?”

“됐고! 옆집 김 교수 손자가 내일 수학여행 가는데, 김 교수가 새로 산 전기차로 공항에 태워다 줄 거라고 했거든. 무선 충전을 방해하는 요인에는 뭐가 있을까? 혹시라도 아침에 충전이 안 되어 있으면 큰일이니까 내가 대신 점검해 주려고 그래.”

멍청한 노벗으로부터 필요한 정보를 얻었다. 매주 수요일 저녁이면 김 교수는 어울리지도 않게 젊은 사람들 모임에 다녀와서 바로 쓰러져 잠든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집의 불이 켜졌다가 다시 꺼질 때까지 기다린 후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사각지대를 통해 CCTV로 다가가 긴 막대기로 밀어 천장을 바라보도록 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 김 교수의 차를 찾았다. 재활용 쓰레기장에서 주워 온 스테인리스 쟁반을 김 교수의 못생긴 차와 무선 충전 패드 사이에 밀어 넣었다. 화려한 불꽃과 매콤한 연기를 기대했건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충전 패드와 연결된 충전기에서 빨간 불이 깜빡이더니 “이물질이 감지되어 충전을 중지합니다”라는 안내와 함께 충전 표시가 꺼졌다.

“됐어! 김 교수가 골탕 좀 먹겠군.”

“그렇지 않습니다. 저 차량은 이미 공항을 다녀오기에 충분할 만큼 충전되었습니다. 굳이 김 교수님을 깨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차! 노벗을 꺼놔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깜빡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충전 시작 일시와 충전기 용량을 조회했습니다2. 저 무선충전기는 이 차량을 한 시간에 80퍼센트까지 충전할 수 있습니다.”

유선도 아닌 무선 충전이 그렇게 빨랐나? 밤새도록 충전할 줄 알았는데. 하지만 이렇게 그만둘 순 없었다. 다른 타깃을 찾기로 했다. 오랜만에 지하 주차장을 둘러보니 별별 이상하게 생긴 차가 많았다. 내 멀쩡한 차를 두고 매연이 발생한다면서 덥고 춥고 새똥 맞는 지상 주차장으로 내몰더니 이곳은 휠체어와 오토바이 사이에서 태어난 혼종부터 바퀴 달린 숙박 캡슐까지 다양한 탈것들의 동물원이 되어 있었다3.

최 여사의 장난감 같은 차가 눈에 띄었다. 맨날 나한테 폐차하라고 악담하는 못된 여자인데, 물증은 없지만 까나리 액젓으로 내 차를 테러했던 범인도 그 여자이리라 확신해 온 터였다. 그런데 최 여사의 차에는 배터리가 들어 있을 만한 공간이 없어 보였다. 전기차가 맞긴 한가? 노벗에게 물어봤다.

“이 소형 차량은 실리콘 음극재 기반의 고밀도 배터리가 바닥에 깔려 있고, 5분 충전으로 300킬로미터를 주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런 배터리가 들어 있으면 꽤나 비싸겠군. 최 여사 카푸어(car poor)가 됐겠어?”

“반도체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리콘 슬러지를 활용하기 때문에 가격은 비싸지 않….”

노벗을 꺼버렸다. 솔직히 그렇게 빨리 충전되고 가격도 낮아진 줄 몰랐다. 하지만 위험하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예전에 전기차 화재로 아파트 주차장이 홀랑 타버리는 바람에 한참 고생한 적이 있었다. 물론 내가 그런 일을 저지르겠다는 건 아니다. 이 차는 주변이 비어 있었고, 차의 크기도 작았다. 무엇보다 요즘은 스프링클러의 성능이 강화되고 점검도 철저하게 하기 때문에 큰 화재로 번질 우려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온 아파트에 검은 연기가 퍼지면서 주민들이 화재 경보에 놀라 자다가 뛰쳐나오고 스프링클러로 주차장이 물바다가 되면 최 여사는 욕을 실컷 먹을 거다.

나는 휴대용 가스 토치를 바퀴 달린 카트 위에 부착했다. 토치가 위를 향하도록 각도를 조정한 후 불을 붙이고 조심스레 카트를 최 여사의 차량 밑으로 밀어 넣었다. 차 밑으로 기어들어 가서 파란 불꽃이 배터리에 닿는 것을 확인했다. 몇 미터 떨어져서 카트에 연결된 줄을 잡고 기다렸다. 바로 불붙어 폭발할까 봐 급하게 기어 나오다가 머리를 부딪히기까지 했는데, 생각보다 불이 빨리 붙진 않았다.

마침내 가스 한 통을 다 쓰고서야 연기가 솔솔 피어나기 시작했다. 줄을 잡아당겨 카트와 토치를 회수했다. 이제 불길이 치솟길 기다리는데, 무언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로봇 청소기 같은 녀석이 나타나더니 윙윙거리면서 차량 밑으로 쑥 들어갔다. 이어서 ‘칙칙’ 소리가 들렸다.

호기심에 바닥에 엎드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살펴봤다. 자동차 공장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기계쟁이라 로봇이 뭘 하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로봇은 워터제트4로 배터리 케이스에 구멍을 뚫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으로 물 같은 것을 분사했다5. 순식간에 하얀 증기가 뭉게뭉게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나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도망쳐 왔다.


박 사장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면서 한번 놀러 오라고 했다. 간판에는 ‘레트로핏 센터’라고 적혀 있었다.

“이 녀석 멋지지 않아요?”

박 사장이 번쩍이는 기계 덩어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흠…. 모터에 감속기가 붙어 있는 거구먼?”

“모터와 감속기뿐만 아니라 배터리 관리 시스템, 전력 변환 장치, 중앙제어 장치, 온보드 충전기 등 전기차에 필요한 대부분의 기능이 통합된 거예요.”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은퇴한 기계쟁이지만 여전히 정교하게 잘 설계된 기계를 보면 가슴이 설렌다.

“그래봐야 크고 무거운 배터리가 필요하잖아?”

박 사장은 옆에 있는 배터리를 가리켰다.

“그것도 이젠 옛날 얘기일 뿐이죠. 드디어 전고체 배터리 가격이 싸졌거든요. 게다가 형님이 좋아하시는 드라이브스루 가게에 줄만 잠깐 서 있어도 무선으로 충전되고 햄버거와 함께 자동으로 결제되는 시대라고요. 어딜 가나 알아서 충전되니 요만한 배터리면 충분해요. 게다가 전고체 배터리는 화재 염려도 전혀 없고요.”

“그래서 이걸로 바퀴 달린 소파 같은 거라도 만들게? 요즘 차들은 도대체 차같이 생겨 먹질 않았다니까.”

“아뇨. 형님 차를 레트로핏6해 드리려고요.”

“뭐, 레트로핏?”

전기차 출시 초기에 회사에서는 기존 차량을 전기차로 개조하는 사업을 검토한 적 있었다. 배터리 때문에 실내가 좁아지는 데다 용량도 작아서 멀리 가지 못했다. 각종 부품을 모두 바꾸고 연동하는 것도 큰 문제였다. 하지만 저렇게 통합된 시스템과 작은 배터리라면 기존 차량에도 어렵지 않게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차장에서 본 전기차들의 형태가 다양한 것도 그 덕분이었을 것이다. 고백하자면 전기차와의 대결 이후에 전기차에 관심이 가긴 했었다. 내 생각이 틀렸다고 인정하긴 싫었지만.

“형님이 고리타분해서 전기차를 싫어한 게 아니었잖아요? 여전히 멋진 클래식 카에 최신 심장을 넣어드릴게요.”

노벗이 끼어들어 맞장구를 쳤다.

“조지 클루니 이미지에 잘 어울리겠어요!”

“흠. 박 사장이 새 사업을 한다는데 안 도와줄 수도 없고…. 정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볼게.”

나는 표정을 관리하려 했지만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는 걸 숨길 수 없었다.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의 기술트렌드 매거진 ‘이슈픽’ 2024-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1. Bayes’ theorem: 두 확률 변수의 사전확률과 사후확률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정리. 주인공의 주장 , 즉 “화재가 발생했을 때의 화재확률은 1”이라는 명제는 베이스 정리와 관계없고, 화재가 발생할 사전확률에 관한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

  2. 한국환경공단의 전기차 충전소 정보 공개 API는 충전기 상태, 마지막 충전 시작과 종료 일시, 충전 방식과 용량 등의 정보를 제공한다. ↩︎

  3. 전기차의 핵심 부품이 통합되고 배터리가 소형화되면서 자율주행, SDV(software defined vehicle), 모듈러 차량, 인 휠 모터 등이 상용화되면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형태의 차량이 등장할 것이다. ↩︎

  4. Waterjet Cutting: 고압의 물을 작은 노즐로 강하게 분사해 소재를 절단하는 가공법 ↩︎

  5. 리튬이온 배터리의 화재는 산소를 차단하는 것만으로는 진화하기 어렵고, 겉에 물을 뿌리는 방식으로는 내부의 셀을 냉각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에 드릴이나 워터제트로 차체 하부와 배터리 팩에 구멍을 뚫고 물을 내부에 주입하는 진화 장비가 상용화되고 있다. ↩︎

  6. Retrofit: 구형 시스템을 새로운 부품이나 기술로 업그레이드하는 것. 여기서는 내연기관차를 전기차로 개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