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스템 정상

박정호는 거대한 U자형 콘솔에 앉아 있었다. 그의 시야를 감싸는 세 개의 초대형 스크린은 디지털 정보로 가득했다. 중앙 스크린은 중형 내빙(耐氷) 화물선 ‘제일호’의 디지털 트윈을 3D 홀로그램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150미터급 선체에 부착된 수많은 센서로부터 위성을 거쳐 전달되는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화면에 반영되고 있었다.

모든 시스템 정상

화면 하단의 상태 표시가 녹색으로 깜빡였다. 선체 각 부분의 온도, 압력, 미세 진동, 추진기 RPM, SMR1 출력까지, 박정호는 저 멀리 북극해에 있는 배의 볼트 하나까지 자신의 손안에 쥐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의 시선은 스크린 구석의 작은 알림창으로 옮겨갔다. 박정호 수석 엔지니어. 연속 근무 37시간 경과. 휴식 권고. 피로가 몰려왔지만, 그는 눈꺼풀을 비비는 대신 진한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뒤에서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다가왔다.

“수석님, 좀 쉬셔야죠. 아, 그쪽 AI는 미덥지 않으신가 보죠? 그럼 할 수 없고요.”

권재식이 이름 모를 음료가 든 머그잔을 내려놓고 앉으며 말했다. 그의 스크린에는 드론 수백 대의 상태가 모두 녹색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드론 스타트업 ‘해태 다이내믹스’를 이끄는 CEO이자 천재 엔지니어. 프로젝트 기간 내내 충돌했었는데 지금 또 도발하고 있었다.

“새 시스템과 새 현장입니다.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아요. 그런데 AI만 믿으라고요?”

“자, 불필요한 얘기 그만하시고요. 이제부터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이선영 대위가 말했다. 그녀는 이번 제일호 MRO2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해군의 연락장교였다. 비록 제일호는 해군의 약식 인수 시험을 통과했지만, 이번 첫 비밀 작전에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기술지원이 필요했다. 그것이 이 배를 위장 드론 모선(母船)으로 개조한 박정호와, 드론 시스템을 개발한 권재식이 함정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임시 관제 센터에서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있는 이유였다.

세베르니 라인 통과

알림창이 깜빡이며 세베르니 바스티온이 일방적으로 선언한 통제 구역에 진입했음을 알렸다. 화면을 원격 카메라 피드로 전환했다. 북극해의 거친 얼음 바다가 나타났다. 회색빛 하늘 아래 거대한 얼음덩어리들이 부유하고 있었다. 그가 젊었을 때만 하더라도 이 계절에는 가끔 연구 목적의 쇄빙선만 다니는 곳이었다. 지금은 점점 더 많은 상선이 왕래하고, 조만간 내빙선조차도 필요 없어질 거라고들 전망했다. 어떤 나라는 폭염과 홍수에 시달리는데, 기후변화는 불공평하다.

그때였다. 콘솔 위에 설치된 해군의 위성통신 장치에서 제일호의 함장, 최진성 중령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레이다 콘택트! 미확인 선박 접근 중!”

박정호는 가슴이 철렁했다. 원격 화면이 확대되었다. 멀리 수십 킬로미터 밖에서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세베르니 바스티온의 쇄빙 군함이었다.

과연 저들이 제일호가 어떤 선박인지 알아챌까? 평범한 화물선으로 여기더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을 가능성도 컸다. 통행세를 내지 않았으니까.

초조한 가운데 그림자가 계속 커졌다. 군함은 정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긴장으로 갈라진 최 함장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저들이 재밍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위성통신 상태 이상 무! 전투태세! 드론 전개 준비!”

권재식이 박정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드디어 우리 애들의 실력을 보시겠군요, 수석님.”

권 대표는 긴장과 흥분이 한데 얽힌 표정이었다. 그의 반응도 이해는 갔다. 군용 드론은 실전이 아니면 그 가치를 입증할 수 없다. 선박이 별 탈 없이 운항하는 것에서 안도와 보람을 느끼는 박정호와는 입장이 다를 것이다. 세베르니 바스티온의 습격 가능성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바로 그 가능성 때문에 지난 한 달 간 밤낮없이 일했었다. 그래도 뭔가 석연찮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이 지역에 들어서자마자 이렇게 빨리 나타날 줄은 몰랐다.

권재식의 손이 키보드 위를 빠르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모니터링만 하게 되어 있는데 뭘 하는 거지?’ 그의 스크린을 보니, 미리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낯익은 화면이었다. 그는 밤새워 일하다가도 종종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곤 했었는데, 게임을 하는 건지 전장(戰場) 디지털 트윈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 권 대표의 취향을 볼 때 그 둘의 화면 구성이 비슷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좋았어! 스웜 프로토콜, 실행!”

그의 스크린 속 드론 편대는 흩어진 후 여러 방향으로부터 적함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는 웃음을 머금고 박정호와 이 대위를 번갈아 쳐다봤다.

“잠시 후 실제로 보실 모습입니다!”

그 순간 함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령부, 드론 시스템이 이상합니다. 오류는 없는데, 드론들이 발진하지 않고 있습니다.”

박정호는 디지털 트윈의 드론 격납고를 확대했다. 격납고 해치가 개방된 것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콘솔을 조작해 격납고를 보여주는 카메라 피드를 연결했다. 영상에는 선미의 격납고 해치가 조금 열리다 만 채 멈춰 있었다. 그는 영상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소리쳤다.

“권 대표, 해치가 안 열렸소!”

“네? 그쪽 센서 오류일 겁니다. 제 시스템에는 모든 상태가 완벽하게—”

최 함장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아까보다 더 당황한 것 같았다.

“아지포드 추진기3 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권재식이 영상을 보더니 말을 멈췄다. 박정호는 디지털 트윈의 상태 표시를 다시 확인했다. 드론 해치 개방 완료, 아지포드 추진기 정상 작동 중, SMR 출력 97%. 모든 지표가 정상이었다. 그는 자신의 눈과 자신이 설계한 시스템을 믿을 수 없었다. 심장이 요동쳤다.

이선영 대위는 자리에서 일어나 투박한 군용 휴대폰을 붙들고 해군 사령부와 교신하고 있었다. 간간이 들리는 반응으로는 그쪽도 어쩔 줄 모르는 상황인 것 같았다.

“박 수석! 배가 먹통이야! 해치도 안 열리고, 추진기도 멈췄어! 스크린엔 대체 뭐가 뜨는 거야!”

최 함장이 절규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박정호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등 뒤로 권재식의 넋 나간 혼잣말이 들렸다.

“이럴 리가 없는데….”

“어뢰 접근! 충돌까지 60초!”

다시 함장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제일호는 거대한 표적이 된 채, 바다 위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화면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미친 듯이 시스템 로그를 뒤졌다. 하지만 그 어떤 에러 코드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정상. 정상. 정상….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로그 뷰어를 닫았다.

그때, 다른 파일이 눈에 띄었다. PMS-C-7.pcap. 제일호의 정보계 이더넷과 제어계 필드버스4 양쪽에 연결된 PMS-C-7 모듈의 네트워크 패킷을 캡처해 기록하는 파일이었다. 파일을 열었다. 화면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 몇 분 전부터 다량의 패킷이 필드버스를 장악하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세베르니 라인을 통과한 때부터였다.

짚이는 것이 있었다. 머릿속에 지난 2개월 간의 기억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2개월 만에 프로젝트를 완료하라고요?”

박정호는 혹시 잘못 들었는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선영 대위는 꼿꼿한 자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이 한국에서 가장 자동화된 조선소라면서요? 우리에게는 일정과 함께 보안 유지도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최소한의 인력으로, 최단 시간에 완료해야 합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는 RFP를 다시 들춰봤다.

“제일호는 군함도 아닌 일반 화물선이잖아요. 이런 배에 각종 전투 장비에다 드론 시스템을 장착하다니요. 대체 뭘 하시려는 거죠?”

“박 수석님.”

이 대위가 서류를 덮으며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세베르니 바스티온’을 아시나요?”

“네, 들어는 봤습니다.”

세베르니 바스티온은 원래 러시아의 자원 대기업이었는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난 후 혼란기에 용병 그룹과 세력을 합친 후 독립 국가를 선언한 집단이었다. 이들은 러시아 권력층에 비자금을 대며 그들의 비호 아래 북극 항로를 자신들의 해역으로 선포하고, 지나가는 선박을 나포해 통행세를 받아내거나 화물을 갈취하고 있었다.

“북극 항로는 단순한 항로가 아니라 한국의 생명줄입니다. 세베르니가 그 길을 막고 있어요. 그렇다고 군함을 보내면 대놓고 그들을 자극할 뿐더러 러시아와도 문제가 생깁니다. 모든 화물선을 다 따라다니며 보호할 수도 없고요.”

그녀가 제일호의 설계도를 가리켰다.

“그래서 ‘유령’이 필요합니다. 저들이 한국 화물선 중 어느 것이 이빨을 가졌는지 모르게 만드는 것. 그게 제일호의 임무입니다.”

박정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유령이라. 2개월 만에 유령을 만들라니. 불가능한 일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이미 실현 방안을 탐색하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진해 조선소는 여러 AI가 협력해 통제하는, 네트워크화된 하나의 거대한 기계가 되어가고 있었다. 24시간 쉬지 않는 로봇들이 용접과 조립, 도장과 표면처리 작업을 수행하고 결과를 실시간 검수했다. 로봇만으로 수행하지 못하는 작업은 소수의 현장 인력이 MR5 기반 매뉴얼을 참조해 로봇과 협업하여 수행했다. 모든 작업은 정밀한 디지털 트윈으로 동기화되어, 공정 최적화 알고리즘이 수리와 개조 공정을 시뮬레이션하고 병목을 예측했다. 그가 수십 년간 매달려 고도화해 온 시스템이었다. 이들을 총동원한다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변수가 너무 많았다. 군함이 아닌 민간 화물선이라니. 게다가 탑재해야 할 드론 시스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의 불안한 표정을 읽었는지 이 대위가 말했다.

“드론 시스템은 새로 개발된 최신 기종으로, 개발사에서 이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할 겁니다.”

그녀가 일어서 회의실 문을 열자, 캐주얼 차림의 젊은 남자가 건강 음료를 들고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들어왔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해태 다이내믹스의 권재식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때부터 지옥 같은 2개월이 시작되었다.

진해 조선소의 자동화 시스템은 한계까지 가동되었다. 박정호는 제일호에 해군의 지휘통제 시스템과 해태 다이내믹스의 자동화 격납고를 설치하고, SMR의 출력을 ESS6를 통해 격납고에 연결하는 작업을 시뮬레이션했다. 권재식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의 드론 시스템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수백 대의 드론을 동시에 발진시키고 회수, 재무장하고 작전의 필요에 따라 드론의 모듈을 교체하는 시스템은 그 자체로 완벽하게 자동화된 공장이었다. 그는 해태 다이내믹스가 불과 몇 년 만에 개발해 낸 시스템에 탄복하면서도,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박 수석님, 이 프로세스는 너무 과한 거 아닙니까? 저희 지휘통제 시스템 API를 제일호의 지휘통제 시스템에 그냥 연결하면 됩니다. 연동 규격만 주시면 저희 AI가 인터페이스 코드를 생성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왜 이렇게 복잡한 검증 절차를 거쳐야 하죠?”

권재식은 두꺼운 가이드라인 문서를 못마땅한 듯 툭툭 치며 말했다.

“이건 취미용 드론과 스마트폰 앱을 개발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 배는 수천 킬로미터 밖에서 몇 달을 이상 없이 동작해야 하고, 영하 40도의 얼음 바다를 견뎌야 합니다. 당신 시스템의 사소한 버그 하나가 배 전체를 멈춰 세울 수 있어요.”

“제 시스템은 이미 수천 번의 시뮬레이션을 거쳤다고요.”

“시뮬레이션과 실전은 다릅니다.”

박정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특히 북극의 극한 기후를 걱정했다. 제일호는 유빙에 부딪혀도 버티도록 선체가 강화된 내빙선이었지만, 민간 화물선의 장비들은 해군이 요구하는 내한(耐寒) 규격에 못 미쳤다. 많은 장비에 온도 유지 장치가 추가로 필요했고, 케이블과 커넥터 중에도 극저온 사양으로 교체해야 할 것이 많았다. 드론 시스템은 해태 다이내믹스의 소관이었지만 박정호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이건 과잉 설계입니다. 제 부품들은 이미 군용 스펙입니다.”

“북극해의 염분과 얼음은 당신이 생각하는 일반 군용 스펙에서 가정한 환경이 아닙니다. 영하 40도에서 얼어붙은 물보라를 녹이고 즉시 격납고 해치를 열 수 있나요? 그 온도에서 드론의 리튬 배터리는 용량과 수명이 유지되나요?”

일정이 조금씩 지연되면서 AI 기반 작업계획 시스템의 화면에는 붉은색 알람 표시가 가득했다. 박정호는 일정을 조정할 수 밖에 없다고 이 대위를 설득했다. 큰 일은 프로젝트 마감 2주 전에 터졌다. 새벽에 긴급 호출을 받고 달려가자, 권재식과 그의 직원이 잔뜩 화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이걸 점퍼 안에 숨겨 반입하려 했습니다. AI 보안 시스템이 잡아냈습니다.”

경비원이 작은 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권재식은 부인하지 않았다.

“덴마크 지사를 통해 긴급 공수한 최신형 극저온 대응 항법 보정 모듈입니다. 이게 있어야 GPS가 재밍 되어도 드론 스웜이 오차 없이 작전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꼭 필요하다고요.”

경비원은 고개를 저었지만 박정호는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군의 MRO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도크에 들어가려면 보안 게이트를 통과해야 한다. 게이트의 AI는 출입자가 위험한 물건 또는 보안 검증을 받지 않은 장비나 부품을 반입하는지 확인한다. 최신 모듈이라면 아직 보안 검증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검증에는 빨라도 몇 주가 걸린다. 그는 상자를 들여다봤다. PMS-C-7이라는 제품명과 함께 낯익은 제조사의 로고가 붙어 있었다.

“보안 검증 받고 절차대로 반입하셔야죠.”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권 대표가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쳤다.

“단순한 항법 보정 모듈이고 입출력 데이터라고 해봐야 좌표값일 뿐입니다. 검증 프로세스를 밟아봤자 그 사람들도 형식적인 서류 작업이나 할텐데, 그새 프로젝트가 한 달은 늦어진다고요!”

“네트워크에 연동되는 장비는 엑스레이 스캔과 펌웨어 분석을 받아야 합니다. 그게 규정입니다.”

권재식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가 이내 박정호를 간절하게 바라봤다.

“제발요, 박 수석님. 이 장치는 제가 책임집니다. 제일호가 늦어져서 우리나라 배가 공격받고 인질로 잡히기라도 하면 그건 누가 책임지나요?”

박정호는 망설였다. 그는 수십 년간 원칙을 지켜왔지만 항상 일정이 가장 큰 압박이었다. 어제 저녁 이 대위로부터 간신히 일주일의 추가 기간을 받아낸 터였다. 또다시 더 늦어진다고 말했다간…. 민간인이 인질로 잡히면 책임질 거냐는 권 대표의 말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어쩔 수 없군요. 엑스레이 스캔은 생략하고 펌웨어는 제가 직접 검증하겠습니다. 그리고 해당 모듈의 네트워크 패킷은 모두 캡처해 분석하겠습니다.”

권재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역시 수석님은 말이 통하시는 분인 줄 알았습니다.”

펌웨어는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박정호가 가진 보안 스캐너는 아무런 의심스러운 부분을 찾아내지 못했다. 분석 결과에 따르면 제어계 필드버스는 ‘읽기 권한’으로만 필드버스에 접속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함정에 심각한 위험은 초래하지 않을 것이었다. 박정호의 승인으로 PMS-C-7 모듈은 반입되고 드론 격납고에 설치되었다. 모듈은 모든 시험에서 정상 작동했고 미심쩍은 패킷도 발견되지 않았다. 조금 전 세베르니 라인을 지나기 전까지는.

믿기 싫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PMS-C-7는 지오펜싱7으로 특정 지역에서만 활성화되는, 공급망 공격8으로 심어진 트로이 목마였다. 해태 다이내믹스가 극저온 규격의 항법 보정 모듈을 구한다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닌다는 정보가 세베르니 바스티온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들은 정상적인 칩에 해킹 칩을 함께 패키징하여 입출력을 가로챘음에 틀림없다. 칩 레벨의 해킹이므로 외부 메모리의 펌웨어 검사에서는 이상이 발견되지 않는다. 엑스레이 스캔을 생략한 것이 실수였다. 완벽하게 당했다. 그가 놓쳤고, 그가 승인했다. 그의 책임이었다.


“어뢰 접근! 45초!”

권재식은 자신의 스크린을 쳐다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말도 안 돼…. 내 AI는 정상이라고…. 시스템을 재부팅해보겠습니다!”

“소용없어! PMS-C-7이 트로이 목마였어. 재부팅해도 똑같은 상황이 될 거야.”

“PMS…?”

권재식이 말을 멈췄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오만할지언정 바보는 아니다.

“그러면 이제 어떡하죠?”

“그걸 부수라고 할까요?”

권 대표와 이 대위가 동시에 물었다. 박정호는 위성통신 장치의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설명보다 문제 해결이 먼저였다.

“함장님, 배의 AI가 해킹되었습니다. 콘솔 화면에 뜨는 건 전부 무시하고, 지금 즉시 함교의 비상 기관 제어반 커버를 여십시오. 콘솔 왼쪽 모니터를 뜯어내면 그 뒤에 있을 겁니다.”

그는 디지털 트윈에도 입력되지 않은, 처음 제일호를 돌아볼 때의 기억을 되살렸다. 새로운 디지털 제어 시스템을 설치하면서, 쓸모없어진 구형 제어반을 아예 없애버리자는 젊은 부하 직원의 의견을 그가 거부했던 것이 다행이었다. “그냥 커버로 덮어두고 그 앞에 모니터를 설치해.” 아날로그 백업을 남겨놔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질 것 같았던, 수십 년의 현장 경험이 체화된 직감 덕분이었다.

“레버 보입니다.”

함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게 이 배의 진짜 조종간입니다. 그 옆의 빨간 버튼은 비상 부스트 버튼입니다.”

“확인했습니다. 좌전타, 아지포드 비상 부스트 — 지금!”

숨 막히는 순간, 원격 화면에서 수평선이 기울고 유빙이 옆으로 미끄러졌다. 제일호가 날렵하고 빠른 배는 아니지만 아지포드 추진기는 강력한 추력으로 배를 기민하게 선회시킬 수 있다. 통신기 너머로 짧은 함성이 섞여 들렸다. 함장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피했지만 곧 다시 돌아옵니다. 대 어뢰 드론이 필요합니다.”

“해킹 장치를 네트워크에서 분리해야 합니다. 그 후에 드론 시스템을 재부팅하십시오.”

부숴버리라고 말하려다 생각을 바꿨다. 증거를 최대한 그대로 보전해야 할 것 같았다. 비록 그에게 불리한 증거일지언정. 그는 PMS-C-7 모듈의 위치와 생김새를 빠르게 설명했다. 누군가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갑판을 보여주는 화면에는 선원 복장의 군인들이 나타났다. 위장 커버가 벗겨지고, 기관포가 드러났다. 해군도 모든 것을 AI에게만 맡겨두고 있지는 않았다.

마침내 시스템이 정상화되었고, 격납고가 열렸다. 수백 대의 드론이 벌떼처럼 쏟아져나왔다. 권 대표의 시뮬레이션에서 보던 대로였다. 일부 드론은 어뢰를 디코이로 유도하고 쫓아가 파괴했다. 나머지는 적 함정을 향해 날아갔다. 대공 사격이 시작되었으나 몇 대의 드론이 격추되었을 뿐이었다. 드론들이 함정에 다가가자 더욱 강해진 재밍 때문에 드론과의 연결이 끊어졌다. 드론들은 자율모드로 전환되었고, 그들이 세베르니의 드론들을 요격하고 함정을 공격하는 모습을 망원 카메라가 소리 없이 전했다.

잠시 후, 세베르니의 함정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후퇴하기 시작했다.


흥분이 가라앉았다. 관제 센터가 조용해졌다. 제일호의 원격 화면에는 얼음이 떠다니는 바다 위로 드론들이 속속 돌아와 착륙하는 모습이 보였다. 박정호는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피로가 몰려왔다. 전투는 끝났지만, 이곳에서는 아직 정리할 문제가 남아 있었다.

박정호가 입을 열었다.

“이 대위님. 제가 트로이 목마의 반입을 승인했습니다. 모든 책임은—”

권 대표가 말을 가로챘다.

“아닙니다. 제가 우겼습니다. 저희 시스템이었고요.”

이선영 대위가 두 사람의 말을 막았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의 흥분이 사라진, 피곤하지만 냉정한 장교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두 분. 책임 문제는 앞으로 지겹도록 얘기하시게 될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녀의 말에 두 엔지니어는 침묵했다. 연락장교이자 프로젝트의 해군 측 관리자였던 그녀 역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저는 상부에 보고서를 올려야 합니다. 오늘 일어난 모든 일과 그 원인을요.”

그녀는 박정호를 바라봤다.

“보고서에는 박 수석님이 보안 규정을 어기고 PMS-C-7의 반입을 승인한 사실이 포함될 겁니다. 하지만 일정 압박 속에서 최선을 다했고, 수석님이 함선과 승무원 전원을 구했다는 사실도 함께 기록할 겁니다.”

그녀는 다시 권재식을 바라봤다.

“권 대표님의 공급망 관리에 허점이 있었고, 그로 인해 드론 시스템이 함정 전체를 마비시켰다는 사실 또한 명시될 겁니다. 그리고 드론 스웜이 실전에서 완벽하게 적을 격퇴했다는 사실도요.”

이 대위는 자리에서 일어나 군용 휴대폰과 노트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관제 센터의 문을 열고 나가려다 발걸음을 멈추더니 두 사람에게 돌아왔다.

“아시다시피 저는 보고를 할 뿐입니다. 최종 판단은 상부에서 할 거고요.”

그녀는 말을 멈추고 두 사람을 쳐다봤다. 딱딱했던 표정이 조금 풀린 것 같았다.

“이번 승전은 대대적으로 언론에 보도될 겁니다. 제일호 같은 배가 여러 척 더 필요할 거고요. 해군은 보안 문제를 굳이 부각해서 이 성과에 흠집을 내기 싫을 겁니다.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이 대위가 다시 문을 열고 나갔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 갔다.


  1. Small Modular Reactor. 소형 모듈 원자로 ↩︎

  2. “함정 MRO산업과 AI‧자율제조” 참조 ↩︎

  3. Azipod propulsion system. 360도 회전이 가능한 전기 추진 시스템으로 쇄빙선, 내빙선에 많이 사용된다. 프로펠러가 달린 포드(pod) 자체가 방향을 바꿔 별도의 방향타 없이 선박을 조종할 수 있어 유빙 사이를 빠져나갈 때 유리하다. ↩︎

  4. fieldbus. 실시간 제어를 위한 산업용 네트워크 프로토콜의 통칭. ↩︎

  5. Mixed Reality. 혼합 현실. “제조현장 적용 AI 융합 기술 동향” 참조 ↩︎

  6. Energy Storage System. 원자로는 수백 대의 드론을 충전할 때 발생하는 빠른 전력 부하 변화에 대응하기 어렵기 때문에 ESS가 필요함. ↩︎

  7. Geo-fencing. 특정 지역에 진입하거나 이탈할 때를 감지해 특정 동작을 실행하는 기술 ↩︎

  8. Supply Chain Attack. 제품이나 서비스가 사용자에게 전달되기 전, 제조나 유통 등 신뢰할 수 있는 공급망 단계에서 미리 악성 코드나 하드웨어를 삽입하는 해킹 기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