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택시: 진화의 시작

“근데 그거 너무 비인간적, 아니 비원숭이적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좀 너무한 거 아냐?”

이미 소주를 몇 잔 마신 민수는 대학 동기 모임에 방금 도착한 태민이가 요즘 어디서 일하는지 듣고는 따지듯이 물었다.  

“잠깐, 먼저 이것 좀 먹고.  오늘 중국 출장 다녀오느라 점심도 못 먹었거든.”

태민이가 삼겹살과 김치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일단, 원숭이가 아니고 침팬지야.  사람과 같은 유인원이라서 원숭이보다 똑똑해.  그래서 약간의 유전자 조작과 함께 기계로 능력을 증강시킨 침팬지, 즉 Genetically-Enhanced Machine-Augmented Chimpanzee, 지맥(GEMAC)을 훈련시키면 사람이 하는 일 중에서 간단한 건 대신할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사람하고 가까운 유인원이라면 그 뭐냐, 권리 같은 것을 더 존중해줘야 하는 것 아냐?”

나도 거들었다.

“아마 네가 젊었을 때 일하던 곳보다 근무 조건이 나쁘지 않을걸?  동물권 단체하고도 곧 가이드라인에 합의할 수 있을 거야. 어차피 얘네들이 너무 힘들어할 정도로는 일 시키지도 못해.  그러면 승객들이 봤을 때 표정에 드러나거든.”

식당 종업원이 불판을 가는 동안 잠시 기다리던 태민이 얘기를 계속했다. 

“우리가 새끼 침팬지를 받아오는 중국 파트너사 쪽도 문제가 좀 있기는 했는데 그것 때문에 지금 막 만나고 오는 길이야.  그쪽도 곧 해결될거야.” 

태민이는 왜 지맥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컴퓨터를 침팬지의 두뇌와 직접 연결한 기계-생물 하이브리드 지능이 어떻게 인공지능보다 더 경쟁력이 있는지 말을 이어 나갔다.  이미 여러 번 이런 논쟁을 해 본 건지 마케팅 부서에서 만든 매뉴얼을 읊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더 따져봐야 입만 아프다는 것을 깨달은 친구들은 삼겹살을 마저 먹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마치 오늘처럼 미세먼지가 많은 날에는 삼겹살이 정말 효과가 있다고 믿는 듯이.

 

“난 좀 먼저 일어날게.  지금 기차를 타야 버스 막차 타고 집에 들어갈 수 있거든.”  태민이가 최근 글로벌 기업에 인턴으로 들어갔다는 아들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할 무렵 내가 짐을 챙기며 말했다.

“어, 너 참 강원도에 산다고 했던가?  언제 내려갔어? 그리고 그 짐은 다 뭐야?”

“한 3년 전부터 고향에서 농사짓고 있어.  이건 농장에 필요한 헤파 필터이고.”

“지훈아, 네가 오늘 내 옆에 앉아서 운이 좋았다. 일단 앉아봐.  너 편하게 집에 갈 수 있게 해줄게.”

나는 오늘 태민이 옆에 앉아서 운이 나빴다고 생각했지만,  무거운 짐을 들고 버스를 갈아타가며 농장에 갈 걱정을 하던 참이라 일단 앉았다.  태민이가 보내준 링크를 클릭해서 앱을 설치하고 쿠폰도 하나 받았다. 

“다른 차량 호출 앱과 사용법은 똑같아.  강릉역에서 내린다고 했지? 우리 회사가 강원도 쪽부터 베타 테스트 중이거든.  내리기 10분쯤 전에 미리 앱으로 차량을 호출해. 아직 차량이 많지는 않으니 오는데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몰라.”

“알았어. 잘 쓸……”

“폰 이리 줘 봐”

내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태민은 폰을 뺏어가서 앱의 화면을 이리저리 눌렀다.

“이건 내부 테스터용 앱이야.  내가 디버깅 메뉴를 활성화시켰어.  이거 한번 봐.”

얼핏 보니 가까운 차량의 리스트 같았다.  태민이가 그중 하나를 선택하니 뭔지 모를 복잡한 화면이 나타났다.

“여기 GEMAC-138 이라고 보이지?  이게 지맥 드라이버 이름이야. 그 밑에 나타나 있는 것은 현재 상태와 최근 수행 평가 점수이고 이건 요즘 수면 학습 받고 있는 데이터 세트인데, 이 사이즈를 봐.  뉴로모픽칩하고 두뇌를 연결해서 하나의 하이브리드 지능 시스템으로 학습시키는 건데, 필요한 데이터양이 인공지능의 백분의 일도 안 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친구들 만나면 자기가 개발 중인 AI가 곧 모든 운전사를 대신할 거라고 자신만만해하던 사실은 잊은 듯, 태민은 말을 이어갔다. 

“AI는 말이야, 99%까지는 학부생인 우리 애도 개발할 수 있어.  그걸 99.9, 99.99%로 만드는 게 어려운 거지. 자율주행차에 요구되는 온갖 센서나 NPU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알아?  그걸 다 동작시키는데 전력도 많이 필요하고. 나도 좀 해봐서 아는데, 아직은 상용화하기 어려운데도 금방 된다고 뻥치다가 투자금만 날리고 망한 회사가 한둘이 아니잖아.  나야 뭐 그 전에 회사 옮겼지만.”

회사 주가가 떨어지기 전에 스톡옵션 행사하고 사이닝 보너스까지 받아가며 다른 회사로 옮긴 태민의 소식은 시골에 처박혀 지내는 나도 들은 적 있었다.  내가 농작물 팔아서 그만큼 벌려면 얼마나 걸릴지 따져보다가 소주나 한잔 더 마셨다.  

 

2차까지 가자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KTX 막차를 탔다.  자정이 다되어 도착한 강릉역에서 끙끙거리며 짐을 들고 내려서야 아까 태민이가 미리 지맥카를 호출하라고 했던 얘기가 생각났다. 다행히 앱으로 호출한지 10분이 채 안 되어 지맥카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손님. 저는 지맥 257 기사입니다. 목적지까지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짐은 트렁크에 실어 드릴까요?”

실제로 지맥 257이 입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마에 붙어 있는 장치의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였다. 태민에 따르면 전두엽에 삽입된 나노 전극 어레이가 두뇌의 신호를 읽어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인데, 사실 번역이라기보다는 지맥이 훈련받았던 비슷한 상황을 떠올리면 미리 준비된 문구가 적당히 조합되어 출력되는 것에 가깝다고 했다.  뭐, 사람들도 상황에 따라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오는 건 마찬가지다.

사람보다 체구가 작은 지맥 257은 내 짐을 겨우 트렁크에 싣고, 뒷문을 열어준 뒤, 내가 타기를 기다렸다가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운전석으로 갔다.  나는 이런 과잉 친절이 좀 부담스럽게 느껴지긴 했지만, 얘네들이 훈련받은 대로 하게 두지 않으면 더 불편해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사람들처럼 가짜 웃는 표정을 짓지는 않네.’  어릴 적 TV에서 본 침팬지의 웃는 모습과 소리라면 손님들이 좋아할 것 같지도 않았다.

뒷좌석에 앉아서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지맥 257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반팔 상의와 바지를 입고 있었고, 유전자 조작으로 그렇게 된 것인지 깎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야생 침팬지보다 털이 짧아 보였다.  이마에는 마치 조그만 휴대폰 같이 생긴 장치가 머리를 둘러싸는 띠로 고정되어 있었는데, 띠에는 GEMAC Interface Node - Graphene Optoelectronic Advanced Headband (지맥 연동 노드 - 그래핀 광전자 첨단 헤드밴드)라고 쓰여 있었다.  태민이가 개발에 깊숙이 관여했다고 자랑한 그 장치였다.

“GINGOAH, 긴고아라고 읽는 건데 그게 뭔지 알아?  삼장법사가 손오공에게 씌워준 머리띠 있잖아, 그게 긴고아(緊箍兒)거든.  이 이름도 내가 지은 거야.”

태민이가 화장실 간 동안 사실 이 기술은 다른 스타트업에서 인수한 것이라고 옆자리 친구가 귀띔해줬었다.

지맥의 작은 체구에 맞춰진 운전석 의자와 그 밑에 설치된 전자 장치를 제외하면 차량 자체는 일반 승용차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 같았다.  지맥 257은 시동을 켜고, 백미러를 확인한 후 차를 매끄럽게 출발시켰다.

 

자정이 지난 시내에는 술 취한 사람들이 앱으로 안 잡히는 택시를 몸으로 막아서라도 세워 볼 양으로 어두운 도로 위를 비틀거리며 배회하고 있었다.  지맥 257은 취객들을 피해 차선을 요리조리 바꿔가며 능숙하게 차를 몰았다. 예전에 잠시 공유차량 기사 일을 할 때, 회사에서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시범 도입한 자율주행차는 이런 상황에서 매번 멈춰 섰었다.  최첨단 AI 기술보다 실제 세상에서 몇 억년을 진화해온 동물의 두뇌가 여전히 더 나은 부분이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기술이 조금만 더 발전하면 돈도 얼마 안되는 그 일마저 AI가 다 없애 버리지 않을까 걱정을 했었으나 정작 기사 일을 그만둬야 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자율주행차의 몇 번의 인명 사고와 비용 문제로 회사가 결국 파산한 때문이었다. 지맥 257이 운전하는 모습을 보니 어쨌든 그때 운전 일을 때려치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지까지 얼마나 걸려…요?”

지맥에게 뭔가 말을 걸어봐야 할 것 같았다.  반말을 써야 할지 존댓말을 써야 할지 애매했다.  긴고아가 해석해서 침팬지 뇌에 전달하는 신호에 존댓말, 반말의 구분이 있기나 할까?

“지금은 교통이 원활해서 목적지까지 1시간 15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지맥이 내비게이션을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긴고아의 스피커가 즉시 대답했다.  예상된 질문에 대해선 침팬지의 뇌를 거치지 않고 긴고아가 미리 프로그램된 답을 주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떤 질문은 긴고아가 직접 답을 주고 어떤 질문은 침팬지의 두뇌가 개입하는 것일까? 어릴 때부터 긴고아와 결합되어 세상과 일을 배운 지맥에게 있어 기계와 생물학적 두뇌의 기능을 떼어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있기는 한 것일까?

“개인적인 걸 물어봐도 되나요?”

“저는 차량의 운행이나 교통상황에 대한 질문 외에도 뉴스, 지역 정보, 운행 중 이용하실 수 있는 콘텐츠 등 다양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아직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리지는 못하며, 이 대화는 모두 저장되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또한 미리 준비된 메시지인 것 같았다.  뭘 물어보면 진짜 지맥의 생각을 들을 수 있을까?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일해도 야간근무수당 같은 것은 못 받죠?”

“저희 지맥은 3교대로 일하고, 일하지 않는 시간에는 충분한 휴식 시간이 보장됩니다.  수면 학습 시간을 포함한 모든 활동은 동물보호 협회와 하이브리드 지능 협회의 가이드라인 내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런 류의 질문으로는 안 되겠다.  대화 기획자가 예상 못 했을 만한 것을 물어보자.

“마지막으로 화장실에 언제 들렀나요?”

“죄송합니다. 이 질문은 이해하지 - 꺄아 끼-익… 지맥 257은 소변이 마렵지 않습니다.”

역시 이런 질문에는 답을 못하는 군,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지맥이 내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고 자기 나름의 답변을 표현하자 컴퓨터가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었다.  침팬지 소리를 번역한 것인지, 두뇌의 신호를 읽어 문장을 생성한 것인지 알 도리는 없었다. 흠, 이 정도 의사표현은 침팬지 스스로 가능하네. 하긴 유전자 조작이나 긴고아 같은 것 없이도 침팬지와 사람이 수화로 간단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흐르자 지맥이 - 어쩌면 긴고아가.  구분이 안 된다 - 먼저 말을 했다.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 드릴까요?”

‘어떻게 내가 무슨 음악을 좋아하는지 안다는 거지?‘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내 휴대폰의 지맥카 앱에서 음악 라이브러리 접근을 허용할지 묻는 알림이 떴다.  ‘허용’을 선택했다. 다음 번에 지맥카를 타면 내 취향의 음악뿐만 아니라 개인화된 광고가 나올 것이다.  음악을 권하는 것은 손님과 대화가 잘 진행되지 않을 때 어색함을 해소하기 위해 음악이나 듣고 있으라는 서비스 기획자의 아이디어였을 수도 있다.  조용한 피아노 음악을 들으면서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 다시 한번 안내 드립니다. 현재 지맥 관제 센터와 연결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맥카는 독자적으로도 안전하게 운행될 수 있지만 만일의 가능성에 대비하여 차량을 안전한 곳에 정차시켰습니다.  잠시만 차 안에서 대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관제 센터에서도 이 상황을 인지하고 있으므로 곧 적절한 조치가 취해질 것입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차량의 방송에 잠을 깼다. 차량은 도로변에 정차해있고 지맥 257은 시동을 끈 채로 운전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지?”

아차, 아까는 존댓말을 쓰고 있었는데, 아직 잠이 덜 깨어 정신이 없다 보니 얼떨결에 반말을 해버렸다.   이랬다저랬다 하면 더 우스워 보일 테니 지금부터는 반말을 써야겠다. 어쨌든 지맥은 나보다 나이도 한참 어릴 것이 분명했다.

“우욱 꺅꺅… 죄송합니다. 기다려주세요.”

지맥 257도 무슨 일인지 모르는 데다, 네트워크가 끊어진 상태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답변에도 한계가 있는 듯했다.  다행히 지맥의 울음 소리와 나노 전극의 신호를 인간의 언어로 변환하는 기능은 여전히 동작하고 있었다.

휴대폰을 켰다.  지맥카 앱에 콜센터 전화번호가 있을 텐데… 전화번호를 눌렀으나 통화 중이었다.   

자정이 넘은 한밤중, 외진 도로변에서 지맥과 단둘이 있으려니 좀 불안해졌다.  그나마 달이 구름 사이로 빛을 비추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차량 실내등 외에는 주위가 완전히 캄캄할 뻔했다.  지맥 257의 표정을 살펴봤다. 뭔가 초조한 모습이다. 갑자기 야생 침팬지로 돌변해서 나를 공격하고 숲으로 달아나진 않을까?  

“무슨 일인지 알아?”

“우욱 꺅꺅… 죄송합니다.  대기해 주세요.”

역시, 스스로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문득 지맥의 IQ가 얼마나 될까 궁금해졌다. 나중에 태민이에게 한번 물어봐야겠다.

 

한참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지만 시계를 보니 겨우 10분이 지났다.  계속 차량이 움직이지 않으면 어떡하지? 이 시간에는 마을버스도 끊겼고, 택시도 이런 외진 곳으로는 불러도 잘 안 온다.

 

아 참, 필터!  트렁크에 실려 있는 헤파 필터를 내일 아침까지 비닐하우스에 설치하고 필터의 블록체인 칩을 인터넷에 연결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클린에어 인증이 무효가 되고, 지금 키우고 있는 야채를 모두 헐값에 팔아야 할 뿐만 아니라 인증을 다시 살리는 절차에 3개월이나 걸린다.  여유있게 미리 교체해 둘 걸… 후회해도 이미 늦었지만, 비용 좀 줄여보겠다고 서울 간 김에 직접 사 오려 했던 것이 실수였다. 지난주에 미세먼지 농도가 높아지면서 교체 시점이 앞당겨지지만 않았어도, 모임에서 태민이 옆에 앉지만 않았어도, 태민이가 자기네 서비스 써보라고 할 때 적당한 이유를 둘러대고 거절하기만 했어도 이런 걱정 안 했을 텐데. 

“이봐, 지맥. 이거 오래 걸릴 것 같은데 그냥 출발하면 안 될까?  가는 길은 내가 알거든.”

“우욱 꺅꺅… 죄송합니다.  대기해 주세요.”

“어이, 괜찮아. 단지 네트워크가 끊어진 것뿐이고 차에 이상은 없잖아. 아까 안내 방송에서도 지맥카가 독자적으로 운행될 수 있다고 했고.”

“……. 우 우욱 꺅꺅… 죄송합니다.  대기해 주세요.”

스피커에서 나오는 말은 동일했지만, 내가 계속 재촉할수록 지맥 257의 표정과 몸짓에서는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보였다.

“내가 좀 빨리 가야 하는 이유가 있어서 그래.  늦어지면 손해를 많이 보거든.”

“…… 죄송합니다.”

지맥 257이 울상을 지었다. 침팬지가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나?  아니면 그냥 내 상상으로 표정을 해석한 건가? 적어도 사납게 굴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유순하게 개량되었다는 태민의 말이 맞나 보다. 하지만 더 압박을 가하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지맥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휴대폰으로 게임도 하고 동영상도 보면서 시간을 때우다 보니 1시간이 금방 지났지만, 배터리가 얼마 안 남아서 그나마도 더는 할 수 없었다.  지맥 257은 아까의 초조한 모습은 사라지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이런 경우에 대한 훈련도 받는 것일까? 긴고아가 침팬지를 컴퓨터의 슬립 모드 같은 상태로 만들 수도 있을까?  지맥카 콜센터는 여전히 연결이 안 됐다. 휴대폰으로 본 뉴스에는 지맥카 소식이 나왔다.

“<속보> 지맥카 베타 서비스가 네트워크 장애로 중단.  회사 관계자에 의하면 모든 차량은 안전한 곳에 정차 중이지만 언제 서비스가 재개될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고 함.”

서울이었으면 그냥 내려서 다른 차 잡아타고 가면 됐을 텐데…  서울 살다가 시골 중에서도 외진 곳으로 가니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다.  지맥 257을 설득해서 빨리 출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문득 태민이가 설치해 준 앱의 내부 테스터용 화면이 생각났다.  어쩌면 수동 오버라이드 같은 기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앱을 켜봤다. 다행히도 앱과 긴고아는 관제 센터와는 관계없이 휴대폰의 블루투스를 통해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  게다가 역시 투자 많이 받은 회사에서 만든 앱이라, 이런 디버깅용 기능조차도 전문적인 UI 기획자의 손을 거친 것이 분명했다. 메뉴 구성이 직관적이고 기능도 대충 이해가 된다. 하지만 [절대 복종 모드], [무조건 출발]과 같은 기능은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재설정] 버튼이 있었다. 뭐가 재설정 된다는 거지? 새로운 주인을 설정? 그러면 내가 삼장법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눌러보자. 설마 뭐가 망가지진 않겠지.

긴고아의 계속 켜져 있었던 작은 불빛이 갑자기 꺼졌다가 몇 초 후에 점멸하기 시작했다.

‘부팅 패스코드 입력’.  지맥카 앱에 6자리 숫자를 입력하는 창이 떴다.  망했다. 그냥 ‘리셋’이라고 써두지 그걸 왜 ‘재설정’이라고…  역시 술 마시고 잘 모르는 기계는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이러다 네트워크가 복구되어도 농장에 못 가는 것 아냐?

긴고아가 비활성화되었지만 지맥 257은 전원 꺼진 로봇처럼 축 처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있던 아까와는 뭔가 달라졌다.  불안한 듯 두리번거리다 나하고 눈이 마주쳤다. 처음에는 시선을 피하는 듯했으나 이윽고 나를 관찰하듯 쳐다보며 눈을 껌벅였다.

“미안… 내가 잘못 건드렸는데 괜찮은 거지?”

“…….”

계속 눈만 껌뻑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 참, 긴고아가 꺼졌지.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것도 긴고아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나?  다시 한번 두려워졌다. 야생의 본능이 되살아나지는 않을까? 차에서 내려 달아나면 지맥보다 내가 빨리 뛸 수 있을까?  개울에 뛰어들면 지맥은 털이 젖는 게 싫어서 포기하지 않을까?

다행히 지맥 257은 나를 더는 쳐다보지 않고 차량의 라디오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볼륨을 갑자기 높였다가 자기도 놀라서 끽끽거리는 소리를 낸 후 볼륨을 낮추고, 채널을 바꾸다가 댄스곡이 나오자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예전에 탔던 손님의 음악 취향이었나? 나도 이 모습을 보며 긴장이 좀 풀렸다. 휴대폰을 꺼내 지맥 257의 율동하는 모습을 녹화했다. 지맥 257은 촬영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이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리면 조회수가 꽤 나올 것이다.

지맥 257이 갑자기 나를 쳐다봤다.  녹화를 해서 기분이 나빴나? 휴대폰을 뺏어 녹화된 것을 지우려나?  지맥 257은 율동을 계속하며 나에게 손짓을 했다. 설마, 같이 춤추자는 거야?  농장을 배경으로 지맥과 함께 군무를 추는 동영상이라면 사업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쉽게도 나는 지독한 몸치였기에 그럴 수 없었다.  손을 저어 거절 의사를 표현해도 지맥 257은 이해를 못 한 건지 고집이 센 건지 계속 내게 손짓을 했다. 계속 거절하고 버티려니 부담이 느껴졌다.  다행히 평생 음치에다 몸치였던 나는 이럴 때 써먹는 방법이 있었다. 지맥 257을 쳐다보면서 내 아랫도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난 볼일 보고 와야 해”

차에서 몇 십 미터 떨어진 수풀로 가서, 마치 볼일 보는 데 특별한 장소가 필요한 듯 최대한 시간을 끌며 주변을 살핀 후 적당한 곳에 소변을 보고 돌아오는데 지맥 257이 율동을 멈추고 쳐다보고 있었다. 불현듯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목마르지?”

차량에 탑승객용으로 비치되어 있던 생수를 지맥 257에게 내밀었다. 처음에는 어쩔 줄 몰라 하던 지맥 257에게 두 번 더 권하자 마지 못하는 표정을 지으며 생수를 받아 들었다. 일단 마시기 시작하니 500CC 한 통을 순식간에 다 마셨다. 그래, 이제는 시간문제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지맥 257이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완연해졌다.

“나처럼 저쪽에 가서 볼일 보고 오면 돼. 나는 차 안에 있을게.”

말을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의미는 통했다.  지맥 257은 내가 소변을 본 장소로 갔다. 지맥 257이 바지를 내리는 순간, 나는 잽싸게 뒷좌석에서 내려 운전석으로 갔다.  아까 지맥 257이 운전하는 모습을 보니 긴고아가 차량과 직접 연결되어 조종하는 것은 아닌 듯했고, 사람과 마찬가지로 핸들과 기어로 조작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지맥카를 충분히 운전할 수 있을 것이었다. 사실 지맥은 내 일자리를 뺏은 놈들이니, 몇십 미터 차를 슬슬 몰고 가며 골탕 먹이다가 태워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침팬지 몸에 맞춰 제작된 운전석 의자는 충분히 아래로 내려가지도, 뒤로 밀려나지도 않았다. 오른쪽 다리를 핸들 너머로 넘기고 엉덩이를 의자에 겨우 올려놓기는 했으나 머리가 천정에 닿아 목을 똑바로 세울 수도 없고 앞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엉덩이를 앞으로 빼니 엉덩이가 핸들 밑으로 겨우 들어가기는 했지만, 아랫배가 눌려서 숨쉬기도 어려웠다. 포기하고 다시 내리려 했지만, 이번엔 오른쪽 다리가 핸들 위로 잘 넘겨지지 않고, 억지로 다리를 들어 올리자 종아리에 쥐가 날 것 같았다. 체중을 줄이고 필라테스를 열심히 했으면 이럴 때 자세가 나왔을 텐데.  어정쩡한 자세로 몸이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지맥 257이 돌아왔다. 처음에 어리둥절하며 상황을 살피던 지맥 257은 내 자세를 보더니 이빨을 드러내 꺅꺅거리고 웃으면서 손뼉을 쳤다. ‘이런 모멸감이라니…’ 하지만 할 수 없었다.

“지맥, 좀 도와줘.”  

지맥 257이 다가오더니 내 몸을 끌어안고 당기기 시작했다.  지맥의 숨결이 느껴졌다. 사람과 다른, 동물 특유의 불쾌한 냄새가 나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은은한 향수 냄새만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도록 하려면 이런 문제쯤이야 해결해 놓았겠지. 지맥 257과 함께 힘을 합쳐 내 뻣뻣한 몸을 운전석에서 끌어내린 후, 지맥이 뒷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조수석으로 가서 앉았다.

“고마워.”

지맥 257은 이빨을 드러내어 미소를 지은 후,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잡고 시동을 켰다.  

‘어라, 이젠 내 흉한 꼴 한번 봤으니 대신 부탁을 들어주는 건가?’  그보다는 긴고아가 리셋되면서 강제 정차를 지시하는 신호도 함께 꺼져서, 그냥 자신의 생물학적 뇌에 습관화된 운전을 하려는 것이겠지.  뇌에 직접 연결된 전극으로부터 명령을 받는다는 것은 대체 어떤 느낌일까? 머릿속의 목소리? 이유없이 뭘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 설마 터미네이터처럼 기계의 명령이 눈으로 보는 화면에 오버레이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니겠지?  매 순간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지시하던 머릿속 신호가 갑자기 사라졌을 때의 느낌은 어떤 것일까. 특정 상황에서 특정 행동을 하도록 학습된 인간도 긴고아를 착용한 침팬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은 아닐까? 지도자의 명령이 옳은지 생각도 안 해보고 무조건 추종하는 사람들은?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맥 257은 여전히 차를 능숙하게 조작했으나 긴고아의 도움이 없는 지맥은 내비게이션 없는 길치였다.  나도 가는 길을 안다고 지맥에게 말했었지만, 정작 표지판 없는 갈림길이 나타나니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쪽으로 들어서고 나서야 이쪽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이 아니야.  돌아가야돼.”

손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지맥 257이 내 손짓을 보긴 했지만, 고개를 젓고 계속 직진했다.  유턴하는 손짓을 했으나 소용없었다. 아마 긴고아가 없이도 노란 실선을 넘어가면 안 된다는 정도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시간엔 대충해도 된다고.  주변에 차가 한 대도 없잖아. 교통 경찰도 없고.  융통성 없는 공무원들이 실선을 그려놨다고 진짜로 다 지켜야 하는 건 아니야.”

마치 지맥 257이 이 얘기를 알아듣기라도 할 듯이 얘기해봤지만, 어쨌든 소용은 없었고 우리는 가야 할 방향에서 점점 멀어져만 갔다.  도대체 차선은 언제 끊어지는 거야?  

멀리 길가에 무인 편의점이 보였다.  일단 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생각해보자.  지맥 257에게 편의점을 가리키며 세워달라고 손짓을 하니 지맥은 시키는 대로 했다.  편도 1차선 도로에는 반대쪽에서 중앙선을 넘어 편의점으로 진입한 바퀴 자국이 편의점 불빛에 뚜렷이 보였지만, 그게 교통 법규를 준수하려는 지맥에게 설득력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출출한데 뭐 좀 먹고 가자.”

지맥 257에게 말하고 차에서 내려 편의점으로 걸어갔다.  지맥은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내가 오라고 손짓을 하자 차의 시동을 끄고 따라왔다.  

컵라면이라도 끓여 먹을 수 있을지 찾아보고 있는데, 지맥 257은 신선식품 매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바나나였다!  유전자 조작과 첨단 기술로 강화된 침팬지이지만 여전히 바나나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웃을 뻔했다.  하지만 바나나를 이용해서 지맥 257의 준법정신을 약화시킬 수 있지는 않을까? 비닐로 낱개 포장된 바나나 몇 개와 내가 먹을 삼각 김밥을 집어 들었다.  무인 계산대에서 결제하는 모습을 쳐다보며 내 뒤를 따라다니던 지맥 257도 나와 함께 차로 돌아왔지만, 시동 켤 생각은 안 하고 바나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저쪽으로 가주면 바나나 하나 줄게.”

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왔던 방향을 가리킨 후  바나나를 주는 시늉을 했다. 이걸 두 번 반복하니 알아들은 표정이었다.  그래도 선뜻 몸에 밴 훈련을 거스르지 못하는 지맥 257을 쳐다보며 바나나의 포장 비닐과 껍질을 천천히 깠다.  드디어 나는 세계 최초로 침팬지가 중앙선을 침범하도록 만든 교통법규 위반 교사범이 되었다.

 

지맥 257은 교차로가 나올 때마다 차를 세우고 바나나를 요구했다.  허기는 분명히 면했을 텐데, 준비한 바나나가 다 떨어지니 내가 먹으려고 샀던 삼각 김밥까지 달라고 해서 자기 의자 밑의 서랍에 챙겨뒀다.  이런 협상 기술은 어디서 배웠을까.  

지맥 257이 라디오를 켰다.  이번에는 나도 아는 음악이 나왔다.  내가 어깨를 들썩거리자 지맥 257도 함께 핸들을 잡은 채로 어깨를 들썩거리며 박자에 맞춰 함께 율동했다.  덕분에 차가 좌우로 조금씩 비틀거렸다. 아마 지나가는 경찰이 봤더라면, 차량을 세우고 지맥에게 음주 측정을 요구했을 것이다.  드디어 농장에 가까운 낯익은 길에 들어섰다. 한 10분만 더 가면 된다.  

 

내가 리셋해버린 후 계속 점멸하고 있던 긴고아의 불빛이 갑자기 점멸을 멈추고 계속 켜졌다.  지맥 257은 차량을 갓길에 세웠고, 내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지맥카 관제 센터의 이수정 오퍼레이터입니다. 손님, 별일 없으신가요?”

“네, 좀 늦었지만 목적지로 잘 가고 있는 중입니다.”

라디오 음악을 끄면서 내가 말했다.

“저희 지맥카가 그동안 네트워크 장애로 차량 운행이 중단되었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손님.”

“괜찮습니다.  베타 서비스 중이니까 그럴 수도 있죠.  저도 한때 IT 쪽 일을 했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은 잘 이해합니다..”  목소리가 상냥하고 예쁜 상담원한테 대답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개인적인 얘기까지 하고 있었다.

“손님, 이해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확인해야 할 사항이 있는데요, 저희 쪽 모니터에는 네트워크가 복구되었을 때 손님이 탑승하신 차량의 지맥 257 드라이버의 이마에 부착된 장치가 꺼져있었던 것으로 보였는데요, 혹시 차량이 비상 정지하던 중에 물리적인 충격을 받았다던가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니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 일은 물론 없었다.  내가 리셋시켰다는 얘기는 굳이 안 했지만.

“알겠습니다, 손님.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 다시 드리고요,  불편 끼쳐드린 것에 대한 보상으로 통화 종료 후에 무료 이용 쿠폰을 보내드릴 테니 앱에서 확인해보시고 앞으로도 지맥카를 계속 이용해주세요.”

 

지맥 257은 운전을 다시 시작했다.  마지막 교차로에서는 먹을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내가 라디오를  다시 틀어도 반응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원래의 지맥으로 돌아갔다.

또 전화가 왔다.  태민이었다. 

“지훈아, 나 태민인데 무슨 일 있었어?”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서비스 장애로 한동안 차량이 정차해 있다가 지금 가는 중이야.”

“아니, 그거야 잘 알지만.  그래서 나도 지금 회사에 나와 있거든.  근데 비상 점검 중인 우리 보안팀에서 나한테 연락이 왔는데, 네가 타고 있는 차량의 긴고아가 리셋된 기록이 있다는데?”

“아, 그거.  사실은 네가 설치해 준 앱을 좀 만져보다가 잘못해서 리셋시킨 거야.”

“그랬을 거라고 짐작은 했어.  보안팀에는 내가 적당히 얘기해둘게.  새벽 시간에 차에서 오래 기다리느라 되게 지겨웠겠다.”

“어차피 네가 알게 될 것 같아서 얘기하자면, 긴고아가 리셋되니까 지맥이 좀 달라지더라구.  얘기하자면 좀 긴데, 결과적으로 내가 긴고아가 꺼진 상태에서 손짓, 발짓에다 뇌물까지 써서 지맥이랑 합의 보고 우리 농장으로 이동하던 중이었어.”

“그래?  그건 재미있는 사례인데.  지금은 비상 상황이라 바쁘고, 나중에 있었던 일 좀 설명해줘.  지맥이 통제받지 않을 때 실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사례를 모으면 도움이 되거든.  우리 회사 연구실에서 관심 있어 할 거야. "

“지맥이 그래도 괜찮은 거야?  괜히 나 때문에 너가 곤란해지는 건 아니고?”  지맥 257이 이런 말을 알아들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전화기를 손으로 감싸며 소근거리며 얘기했다. 

“지맥이 너를 불편하거나 위험하게 만든 건 아니지?  그러면 괜찮아. 관제 센터하고 연결이 안 되면 정차하도록 되어 있지만, 어떤 상황에서건 지맥이 승객을 위험하게는 안 할 거야.  지맥은 긴고아 없이도 사람과 의사를 교환하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거든. 물론 그런 능력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불필요하기도 하고 동물권 협회에서 알아서 좋을 일이 없기 때문에 긴고아로 억제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너도 지맥이 기계 없이도 꽤 똑똑한 줄 이미 알고 있었구나.”

“당연하지.  그것도 모르면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니?”  나는 힐난하는 투로 말했지만, 태민이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지맥 257은 어떻게 되는거야?  지시를 어기고 차를 운전했다고 혼나거나 하지는 않겠지?  필요하면 내가 책임을 -”

“혼내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있었던 일을 분석해보고 필요하면 한동안 재학습시켜야 할거야.  그리고 지금 회사가 온통 비상 상황이라 이 정도 일 가지고 문제 삼을 여유도 없어.”

“그래, 장애가 났으니 너도 많이 바쁘겠다.  나중에 내가 한번 전화할 께.”

“그냥 서비스 장애가 아니고, 음, 그래, 며칠 내로 연락하자.”

 

농장 입구에 도착했다.  지맥 257은 잽싸게 내려 내가 이미 문을 스스로 열었는데도 내가 다 내릴 때까지 옆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문을 닫아준 후, 트렁크로 가서 짐을 내려줬다. 

“손님, 운행 중에 불편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지맥 257의 다문 입 대신 긴고아에서 인사말이 흘러나왔고, 지맥은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다시 차에 탔다.  차량이 출발하고, 나도 필터를 들고 비닐하우스 쪽으로 걸어갔다.

타이어가 흙바닥을 밟으며 나던 소리가 멈췄다.  내가 돌아보자 차량은 서 있었다. 지맥 257이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차 안이 어두워서 확실하지는 않았다.  차량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지맥카가 어둠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비닐하우스의 헤파 필터를 다 교체하고 클린에어 네트워크에 정상적으로 등록된 것까지 확인하고 나니 벌써 동이 트고 있었다.  지맥 257은 지난 밤 나와 함께 경험한 일을 기억할까? 나를 다시 만나면 알아볼까? 다시 긴고아가 활성화되었을 때 기분은 어땠을까?  재학습시킨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밤을 꼬박 새웠지만 여러가지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방구석의 소파에 기대 누워 TV를 켰다. 아침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오늘 새벽에 있었던 지맥카의 서비스 장애에 대한 소식입니다.  유전자 조작으로 개량된 침팬지에 컴퓨터를 연결하여 인간 운전자를 대체하는 지맥카는 동물권 및 일자리 문제 등의 논란이 그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약 일주일 전부터 강원도 지역에서 베타 서비스를 강행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른 새벽, 지맥카 관제 센터의 네트워크가 차단되면서 운행 중이던 백여대의 차량이 비상 정차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아직까지 사고나 다른 물리적인 피해 사례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만, 새벽 시간에 차량 내에서 침팬지와 함께 몇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졸여야 했던 승객들이 심리적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지맥카 사업을 운영하는 G-모빌러티사에서는 기술적인 장애가 있었으며 승객들에게 무료 쿠폰 외에도 추가적인 보상을 제공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저희 뉴스데스크에는 이 사건이 단순히 기술적인 장애가 아니라는 제보가 접수되었습니다. 좀 복잡한 내용인데요, 몇 달 전부터 지맥카와 관련된 이슈를 추적해 온 동물권 협회의 김혜진 기술 이사를 전화로 연결했습니다.   김 이사님, 이 사건이 단순한 기술적인 서비스 장애가 아니라면서요?”

“네, 안녕하세요, 김혜진입니다.  먼저 소위 지맥이라고 불리는 유전자 조작 침팬지와 관련해서 저희 협회는 계속 윤리적 문제를 제기해왔는데요, 지맥카 서비스를 운영하는 G-모빌러티사의 내부 직원 중에도 저희와 인식을 같이하는 분들이 있어서 그동안 회사의 부적절한 운영에 대한 정보를 저희에게 제공해 준 바 있습니다.  그 중 한 분이 조금 전에 제보한 바에 따르면, 이번 서비스 장애는 G-모빌러티사에서 스스로 네트워크를 차단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합니다.”

“회사에서 스스로 네트워크를 차단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해커가 회사의 네트워크에 침입하여 정보를 탈취 중인 것을 발견한 후 급하게 전체 네트워크를 차단하고 비상조치를 취하느라 서비스가 중단된 것이라고 합니다.”

“아, 그랬군요. G-모빌러티사가 하이브리드 지능 기술에 있어서는 세계적으로도 앞선 회사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아무래도 개인정보보다는 이 회사의 기술 노하우 같은 것을 노린 해킹이었겠죠?”

“네.  아직 서비스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개인정보는 얼마 없었을 테고요, 하이브리드 지능을 학습시키는 기술과, 침팬지의 두뇌에 직접 연결되는 장치에 대한 기술적인 정보가 탈취 대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의심 가는 곳이 있기는 한데요, 개인적인 추측이므로 회사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습니다만 G-모빌러티에 유전자 조작된 새끼 침팬지를 공급하는 중국 회사가 해킹에 연루되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 회사는 하이브리드 지능 기술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유전자 조작만으로 지맥보다 지능이 더 강화된 침팬지를 개발하고 있다는 루머와 함께, G-모빌러티에 자금을 투자하는 조건으로 하이브리드 지능 기술을 중국으로 가져가려 했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관련 기술은 중국으로 수출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물론 하이브리드 지능 기술이 인공지능 기술에 포함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만.”

“네, 김 이사님, 이른 시간에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뉴스데스크는 앞으로 지맥카에 대한 정보를 더 입수하는 대로 시청자 여러분께 다시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은 최근 확산되고 있는 조류독감에 대한 소식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처음 발견된 후 유럽에서도 감염이 확인된 이번 조류독감은 새로운 종류의 변종 바이러스가 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데요, 일반적인 조류독감과 달리 사람 간에 직접 전염되는데다 치사율도 높아서 전문가들이 그동안 우려해왔던 세계적 대유행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보건 당국에서는 다음의 지역으로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자제를…”

 

잠이 들었다.  꿈에서 나는 공유차량을 운전하고 있었다.  룸미러로 뒷자리를 보니 지맥 257이 다른 유인원들과 함께 타고 있었고,  룸미러 귀퉁이에 비친 내 이마에는 긴고아가 붙어 있었다. 지맥이 험악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우 욱욱 꺄~악"하고 소리를 내자 내 머릿속에서는 ‘뭘 봐, 빨리 출발하기나 해’라는 말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