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의 빛

500년에 이르는 기나긴 항성간 여행도 이제 마지막 단계로 접어든다.  드디어 내일 아침이면 이주민들의 수정란을 착상시키는 절차가 시작된다.  카론과 레아는 인공 자궁 사용법에 관한 비디오를 세 번째 시청한 후 저녁을 먹고, 이런 날을 위해 아껴 뒀던 와인을 마시며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갈 신세계를 상상했다.  카론은 이제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한 레아의 머리를 천천히 쓸어 넘기다 문득 닫혀 있는 창을 바라봤다.

“우리 눈으로 직접 알파 센타우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카론이 말했다.

“우주 방사선에 노출 돼도 좋으니 실드 열어달라고 해볼까?”  레아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보지 뭐.  첫 아이들 이름은 뭐라고 할까?  AI가 이름 지을 권리는 우리한테 주겠지?”

“그럼, 우리 아이들 이름은 우리가 지어야지.  AI에게 맡겨두면 우리들 이름처럼 태양계의 위성 이름이나 붙여줄걸? "

 

카론과 레아는 50여 년 전 우주선의 AI에 의해 태어났다.  우주선은 광속의 약 1% 속도로 태양과 알파 센타우리 사이에 끝없이 펼쳐진 공간을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한 상태로 항해 중이었다.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AI가 우주선의 깊숙한 중심부에 냉동 보관되어 있는 수천 개의 수정란 중 두 개를 선택하여 인공 자궁에서 출산시켰다.  카론과 레아는 AI에 의해 키워졌고 AI와 함께 수백 년의 항해 중에 고장 난 기계를 하나씩 수리해가며 도착을 준비해왔다. 선내 공작실에는 우주선의 모든 부품의 고장에 대비하기 위한 작지만 다양한 기능을 가진 수리 및 제조 장비들이 있었다.  카론과 레아는 수천 시간의 비디오를 보며 이 장비들의 사용법을 익혀야 했지만, 생각보다 고칠 것이 많지는 않았기에 실내 농장을 관리하고 남는 시간에는 주로 테라포밍에 대한 이론을 공부하며 이주민들을 교육하기 위한 자료를 작성했다. 내일 아침부터 다섯 대의 인공 자궁에서 10개월마다 아이들을 차례로 출산시키면 알파 센타우리에 도착할 즈음에는 이 우주선도 수십 명의 아이로 시끌벅적해질 것이다.  그러면 회전축 반대쪽에 있는 제2 라이프 돔도 봉인을 열고 사용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 자격이 있을까?”  레아가 말했다.

“무슨 소리야? 우리 둘이 모든 준비를 다 하고 아이들도 키울 텐데 당연하지.”

“열심히 일한 것만으로 충분하냐는 말이지.  아이들도 테라포밍이나 생존에 필요한 지식이야 우리처럼 우주선의 라이브러리에서 공부하겠지만 새로운 세계에 필요한 규율과 가치관은 우리가 많이 가르쳐야 할 텐데, 과연 지구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도록 우리가 이끌 수 있을까?”

“우린 그 역할에 제일 적합한 자질을 가진 유전자로서 선택된 거잖아.  윤리와 철학, 사회학에 대해서도 많이 공부했고. 평생을 준비해왔는데, 잘 할 수 있을 거야.”

갑자기 선실의 스피커에서 AI가 말했다.

“레아, 카론,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새삼스럽게 뭘?  내일부터가 진짜로 중요한데.”  카론이 담담히 말했다.

“이제 더 이상 고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레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제2 라이프 돔에서 12년 전 태어난 트리톤과 아리엘이 필요한 교육을 마쳤기 때문에 내일부터 이 라이프 돔은 스탠바이 모드가 됩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제2 돔의 누가 어쨌다고?”

“미리 말씀드릴 수 없었던 점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우주선은 알파 센터우리를 거쳐 바너드 항성계로 가는 중이며 도착까지는 약 350년이 더 소요됩니다.  트리톤과 아리엘은 앞으로 40년간 이 우주선의 유지관리를 맡게 됩니다.”

“아니, 그게 무슨…”  레아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825년 전, 태양계로 다가오고 있는 떠돌이 블랙홀이 발견되었습니다.  블랙홀이 태양계를 통과하면서 행성들의 궤도를 교란하면 더 이상 지구와 화성에 인류가 거주할 수 없게 될 것으로 예측되었습니다.  겨우 수십여 년의 대응 기간이 주어졌던 여러분의 선조들은 블랙홀이 지나간 후 기존 지구 궤도에 남을 우주 식민지 계획과 병행하여 이 우주선을 급하게 건조해서 인류의 대를 잇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태양계로부터의 신호가 끊어진 것으로 보아 우주 식민지 계획은 실패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312년 전 알파 센타우리에 접근했지만 테라포밍할 수 있는 행성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거리와 여러 관측 결과를 검토한 후 바너드 항성계가 그다음 목표로 정해졌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벌써 태어난 거야?”  카론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시 지구의 최고 기술로도 수백 년 동안 고장 없이 동작하거나 자체 수리가 가능한 우주선과 로봇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새로운 운영팀을 키워서 유지보수를 맡기되, 의욕을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제한된 정보만 제공하고 있습니다.  뉴어스 위원회의 심리학자와 유엔의 지도자들이 고심 끝에 결정한 사항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앞으로 무슨 희망을 갖고 남은 생을 이 깡통 속에서 살란 말이야?”  레아가 울먹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방에는 10분 전부터 두 분이 편안히 눈을 감으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스가 주입되고 있습니다.  저도 AI이지만 매번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무척 어렵습니다. 두 분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다음 운영팀들을 도와 반드시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세계를 찾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침실 문이 찰칵 소리를 내며 잠기고 조명은 어두워졌다.  카론과 레아는 소파에 나란히 기대앉아 서로의 손을 잡았다.  생전 처음으로 외부 창의 실드가 열리자 캄캄해진 실내를 별들과 은하수가 가득 채웠다.  바너드별을 찾는 두 사람의 눈은 점차 흐릿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