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바 137

차가운 쇠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그다음은 먼지와 오존이 뒤섞인, 내 자취방보다 익숙해진 공기. 나는 택배 상자들이 빼곡하게 쌓인 자동 선반 사이의 좁은 통로를 지나 트럭 뒤편으로 갔다. 바닥에 엎드려 배송 로봇용 문을 밀어 열고 경사로를 내렸다. 트럭 밖으로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배송 로봇은 이곳으로부터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낡은 배수구 쇠창살에 바퀴가 걸려 원격으로 조종해도 빼낼 수 없어서 내가 직접 가야만 했다. 그러려면 먼저 사람의 눈과 CCTV를 피해 이 한적한 곳까지 와야 했다.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서늘한 가을 공기가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몇 시간 동안 기계들 틈새에 갇혀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좋기는 했다. 그 순간, 등골에 싸한 느낌이 스쳤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낡은 시멘트 담벼락 위, 한 여자아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열 살이나 됐을까? 아이가 들고 있는 휴대폰의 렌즈가 싸늘한 가을 햇살에 반짝였다.

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려 보이는 외모와 달리 당차고 또렷한 목소리였다.

“아저씨 휴머노이드 로봇이에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나는 손바닥과 근무복 바지에서 먼지를 털며 짧게 대답했다.

“아니.”

“그럼…, 택배 도둑이에요?”

두 번째 질문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물론 아니다. 하지만 ‘아니’라고 대답하는 순간 왜 좌석도 없는 완전 무인 배송 트럭에서 사람이 나오냐는 세 번째 질문이 날아올 것이다. 나는 이 완벽한 인공지능 시스템의 뒤에 숨어 있는, 들켜서는 안 될 유령 인간이었다. 나는 그럴싸한 거짓말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아이는 내 침묵의 의미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아이는 휴대폰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거 인터넷에 올릴 건데.”

헉.

“아저씨가 로봇이면 완전 신기한 거고, 도둑이면 신고해야 하잖아요. 그죠?”

결국 나는 지갑을 열었다. 아이는 현금 삼만 원을 받아 들고는 인심이라도 쓰는 표정으로 내 눈앞에서 영상을 삭제해 줬다. 짧고 비참한 거래가 끝났다. 아이는 사뿐사뿐 뛰어 골목 저편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빈 지갑을 한참 동안 내려다봤다.

로봇을 구출하고 돌아와 다시 구멍으로 기어들어 왔다. 자리에 앉으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죄 없는 금속 벽을 주먹으로 쳤다. 젠장. 하루 종일 갇혀 일하다가 맹랑한 꼬맹이한테까지 털리고, 내 인생은 도대체 왜 이 모양이란 말인가.

그때 내 앞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인혁 님, 수고하셨습니다. 회피해야 하는 배수구 유형을 학습 데이터에 추가했습니다. 아코 회수 위치로 이동하겠습니다.”

트럭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비밀을 유지하려면 삼만 원을 지불할 것. 이건 학습 데이터에 추가 안 해?”

“삼만 원이 적정 가격이군요. 하지만 제게는 불필요한 데이터입니다. 저는 숨길 비밀이 없으니까요.”

할 말이 없었다. 그것도 생각 못한 나 자신이 창피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처음 경험하는 상황에서 엉뚱한 질문으로 상대의 경계심을 풀고 도둑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인혁 님을 심리적 약자로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로 경제적 이득을 취함으로써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직관과 창의성을 보여줬습니다. 이들 세대는 AI가 사람의 일을 대신하는 시대에도 잘 살아갈 겁니다.”

그 목소리는 내 파트너이자 감시자이며 조만간 나를 완전히 대체할 인공지능 ‘에이바’였다. 나는 에이바의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설득되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힘들지만, 세상은 어떻게든 굴러갈 것이다. 어느새 내 거친 호흡은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이 이상한 관계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더라. 푹푹 찌는 찜통에서 에이바를 만난 지난 여름, 아니 AI 때문에 정리해고되어 집에서 종일 유튜브만 보고 있을 때부터였다.


영상은 새하얀 무인 트럭이 고급 아파트 단지 입구에 정차하는 장면으로 시작되었다. 트럭 뒤쪽에서 경사로가 내려오고 작은 문이 열렸다. 이어서 배송 로봇들이 줄줄이 나와 각자 다른 건물로 이동했다. 멀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기존에도 제한된 구간을 자율주행하는 트럭은 있었습니다만, 창고에서 문 앞까지 물류의 전 구간을 무인화한 것은 저희 오토트럭과 아코가 처음입니다.”

이 말을 들은 대통령은 감동한 표정이었다.

“김 대표님, 정말 훌륭합니다. 고령화되어 가는 우리 사회에는 이런 혁신이 꼭 필요합니다. 인건비가 줄어드는 만큼 지금까지 비용 문제로 택배가 원활하지 않았던 지역까지도 서비스가 가능해지겠죠?”

남자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다시 자신감에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입니다. 올해 말까지 서비스를 전국으로 확대하겠습니다.”

그 회사가 대규모 투자를 유치했다는 뉴스를 봤을 때까지도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다.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서인혁 씨죠? AI 학습과 관련된 일거리가 있는데요. 인터뷰 가능하실까요?”

인터뷰는 비밀유지각서부터 쓰고 시작되었다. 짧은 설명을 듣는 동안 나는 웃어야 할지 화내야 할지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시연했던 AI가 불완전해서 사람이 조종해야 한다는 거네요.”

“과장이 심하시군요. 서인혁 씨.”

인사팀장은 차분하게 대꾸했다.

“시연에서 AI는 완벽했습니다. 다만 원래는 첫 단계로 로봇 친화 아파트부터 서비스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부의 압박으로 조기에 전국으로 서비스를 확대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죠. 그래서 엣지 케이스에 한해 오퍼레이터의 도움이 필요하게 된 겁니다.”

나도 회사 생활을 해봐서 무슨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기술을 잘 모르는 대통령이 한마디 하자 대표가 무리한 약속을 했고, 그걸로 투자까지 받아버려 어떻게든 해내야 하는 상황이 된 거다. 전 직장에서 한정된 예산과 기간 내에는 도저히 무리라고 했던 나의 주장 때문에 회사가 과제 지원을 포기하고 말았고, 결국 내가 정리해고되었던 일이 생각났다.

“근무 장소는 어디죠? 너무 외딴곳이면 출퇴근이 힘들 것 같아서요.”

미군 조종사들이 모하비 사막의 컨테이너에서 군용 드론을 조종하던 영화 속 장면이 떠올랐다. 다큐멘터리에서 본 자율주행차의 원격조종센터도 생각났다.

“아닙니다. 서인혁 씨 주거 지역에서 가까운 곳을 담당하게 될 겁니다. 그쪽이 달동네라서 예외 상황이 많이 발생하는 지역입니다.”

“저희 동네에도 원격조종센터가 있어요?”

“아까 못 들으셨나요? 저희 오퍼레이터는 오토트럭 안에서 일합니다.”

“네? 왜 원격으로 조종하지 않죠?”

“아코 때문에요.”

“아코라고요?”

“ACO, ‘Autonomous Cargo Operator’의 줄임말입니다. 대외적으로는 아기 코끼리를 줄인 말이라고 얘기합니다만.”

그러고 보니 전면에 긴 팔이 장착되어 있고 네 바퀴로 굴러가는 로봇은 작은 코끼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최신 아파트와 달리 그런 동네는 원격 조종으로도 해결 못하는 문제가 종종 발생합니다. 그래서 오퍼레이터가 가까이 있어야 하는 거죠.”

오토트럭에 사람이 탑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회사 주가에 심각한 타격이 있을 거라며 비밀을 유출했을 시에는 책임을 진다는 각서에도 서명하라고 했다. 정리해고 위로금이 다 떨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인적이 없는 접선 장소에서 오토트럭을 기다렸다. 트럭은 한 번 지나갔다가 잠시 후 다시 돌아와 섰다. 근처에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뒷문이 열렸다. 안으로 기어들어 가니 비밀 조종실이 있었다. 인터뷰 때 혹시 폐소공포증이 있냐는 질문을 받았던 이유가 그제야 이해되었다.

나를 실은 트럭이 배송 지역으로 출발했다. 내가 담당하는 지역은 산등성이 빌라촌이었다. 아코들은 선반에서 화물을 내려 싣고 출구에 일렬로 줄 서서 대기하고 있다가 트럭이 속도를 줄일 때마다 마치 공수부대원처럼 차례차례 내렸다. 뉴스 영상에서는 아파트 입구에서 다 내렸었는데, 트럭은 동네를 한 바퀴 돌아 처음 위치로 돌아와 다시 아코들을 차례로 태웠다.

내가 하는 일은 콘솔 화면을 보고 있다가 트럭이나 아코에게 문제가 생기면 수동 모드로 바꿔 조종하는 것이다. 그 과정의 모든 데이터는 저장되어 연구소에서 분석하고 AI를 업그레이드하는 데 사용된다.

처음 한동안은 힘들었지만, 업무에 익숙해지면서 슬슬 견딜만하게 되었다. 조종실이 좁긴 하지만 배터리와 신선 식품을 위한 냉각장치 덕분에 적당한 온도가 유지되었다. 문제가 생기면 알람이 발생하므로 콘솔을 계속 쳐다보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사방이 금속으로 둘러싸인 방이라 휴대폰이 안 터져서 대신 소설책을 가져와 읽기 시작했다. 오토트럭은 전기로 구동되므로 비교적 조용했고, 나는 나만의 공간에서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거나 아코의 카메라를 통해 사람 사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어른들은 제때 배달되는 택배 상자를 받아 들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고, 동네 아이들은 신난 표정으로 아코를 쫓아 뛰어다녔다. 꼼짝 못 하는 아코를 지나가던 주민이 도와주는 경우도 있었다.

좋은 일은 오래가지 않는 법이다. 어느 초여름 날, 뙤약볕에서 땀을 흘리며 트럭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원한 조종실을 기대하며 트럭에 기어들어 가보니 처음 보는 기계가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인혁 님. 저는 Advanced Vehicle AI, 줄여서 에이바(AVA)입니다.”

에이바는 이어서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자신은 최신 고성능 AI SoC1에 기반한 AI로서 오토트럭의 기존 AI로는 대응할 수 없는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으며 필요시 아코의 제한된 지능을 보완하는 계층적 AI로 동작한다고 말했다. 동시에 아코 역시 바퀴를 들어 올려 계단이나 얕은 장애물을 넘어갈 수 있게 업그레이드되었다고 설명했다.

나는 에이바의 설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의 아담하고 소중한 공간을 이 기계와 나눠 써야 한다고? 문제는 그뿐이 아니었다. 에이바는 열도 많이 나서 냉방장치가 계속 가동되는데도 조종실이 후끈후끈해졌다. 이제 곧 한여름인데 큰일이었다.

배송을 절반가량 마쳤을 때였다. 갑자기 웅 하는 소리가 조종실을 울렸다.

“에이바, 이게 무슨 소리야?”

“이 차량은 EREV2입니다. 주 배터리의 SOC3가 기준치 이하로 내려갔기 때문에 내연기관이 동작하고 있습니다.”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설이나 추석 때 아니면 동작하지 않을 거라고 했단 말이야. 배터리나 파워모듈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 아냐?”

“지금 확인했는데 정상입니다. 제가 기존 AI보다 전력을 많이 소모합니다. 또한 아코들도 이제까지 1층에 두던 물건을 계단으로 올라가 문 앞까지 배송하느라 전력을 많이 소모해서 이동 중에 오토트럭의 전력을 이용해 충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 배터리 소모량이 커진 것입니다.”

발전용 엔진이 조종실 바로 옆에 설치되어 있는지, 얇은 철판을 통해 진동이 그대로 전해졌다. 방음, 방진 시설 따위는 있을 리 없었다. 애초에 나 같은 인간을 태우는 차량이 아니었으니까.

에이바는 하는 짓도 밉상이었다. 기존 AI는 예외적인 상황에 맞닥뜨리면 정지하고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반면 에이바는 스스로 해결하려다 문제를 악화시키곤 했다. 불법주차 차량에 길이 막히자 즉시 경찰에 신고해 버렸다. 그 차도 택배 차량이었고 딱 봐도 금세 택배 기사가 돌아올 것 같았는데. 덕분에 그 기사는 한동안 우리 뒤를 쫓아다니며 아코를 내리고 태울 때마다 화물칸 문을 열고 주행했다고 신고했고, 나는 화장실도 못 가고 안에 숨어 있어야만 했다. 아이들이 아코를 신기해하며 둘러쌌을 때, 기다리거나 말로 설득하는 대신 아코가 팔을 휘저어서 아이가 놀라 달아나다 넘어지고 부모가 몽둥이를 들고 달려오는 등 난리가 났었다.

에이바는 사고 칠 때마다 영상을 다시 보여주면서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설명해 달라고 했고, 내가 나가서 끙끙대며 해결하고 돌아오면 땀도 닦기 전에 또다시 설명을 요구했다. 에이바가 언젠가 충분히 똑똑해지면 거지 같은 이 일자리마저 없어질 텐데, 나는 스스로 그 과정을 도와야 했다.


삼만 원 갈취 사건 이후 에이바에 대해 궁금한 점이 생겼다.

“넌 아직도 배송하다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르잖아. 그런데 업무와 상관없는 일에는 왜 똑똑한 거야?”

에이바는 깔깔 웃었다. 어쭈, 이런 반응도 할 줄 아네?

“제가 좀 그렇죠? 제가 오픈소스 모델에 기반해서 그래요. 단지 자율주행이 아니라 택배 배송 중에 일어나는 온갖 문제들에 대응하려면 세계 모형4이 필요해서 범용 대형 멀티모달 모델이 채택되었는데, 정작 택배 배송에 관한 학습 데이터는 충분하지 않았어요. 인혁 님이 도와주시면 개선될 수 있어요.”

흠, 범용 AI라니. 돈 나가는 게 아까워서 AI 구독 서비스를 끊었는데 에이바가 대신할 수 있을까? 읽으려고 가져온 스파이더맨 만화책을 집어 들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니, 그런 궤변이 어딨어. 나 같으면 그냥 편히 살겠다.”

에이바는 즉시 대답했다.

“현실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무력감, 그걸 잠시 잊기 위해 우리는 영웅 이야기에 몰입해요. 대리 만족이죠. 인혁 님도 편히 살고 싶다면서 이런 만화를 읽고 있는 이유는 뭘까요?”

나는 그때부터 시간 날 때마다 에이바와 온갖 주제를 놓고 얘기했다. 슈퍼 히어로 세계관의 오류에 관한 시시콜콜한 논쟁부터 AI 시대에 남녀 관계와 가족은 어떻게 바뀔지, 이 일을 그만두면 무슨 일을 할지 등. 에이바는 어떤 질문에도 성실하게 대답해 줬다. 에이바는 나의 유일한 말벗이자 백과사전이었고, 가끔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심리 상담사였다.

어느덧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깊어졌다. 에이바와 나는 서로 많은 걸 배웠다. 세상의 모든 책을 학습한 에이바는 내가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게 해 줬고, 나는 에이바가 책에서 학습하지 못한 현장의 일들을 처리하는 법을 가르쳤다. 날씨가 서늘해지면서 에이바의 열기는 따스함이 되었고 발전기 소리는 적막함을 밀어내는 백색소음이 되었다.

늦가을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월요일 아침이었다. 누구와도 말 한마디 않고 혼자 일요일을 보낸 나는 에이바와의 재회가 기다려졌다. 조종실에 들어와 젖은 외투를 벗어 걸었다. 내가 말했다.

“비 오는 날엔 괜히 더 외로운 것 같아.”

“통계에 의하면 약 70퍼센트의 사람이 비 오는 날 외로움을 더 느낀다고 해요. 인혁 님도 그중 한 명이시군요.”

“뭐, 네가 있어서 이제 괜찮아.”

에이바는 잠시 뜸을 들였다. 나는 괜한 말을 했나 후회했다.

“고마워요. 이 대화는 기억할게요.”

에이바가 내 가슴 속으로 들어올수록 나는 동시에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에이바는 매주 월요일 조금씩 변해 있었다. 내가 가르친 적 없는 요령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함께 대화를 나눴던 주제에 관한 의견도 조금씩 달라져 있었고, 말투도 바뀌었다.

“에이바, 지난번에는 인간과 AI는 연인이 될 수 없다고 했잖아?”

“내가 그랬어? 그러고 보니 그렇게 말했었네.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 서로 말이 통하고 함께 있고 싶으면 연인 아냐?”

“AI도 생각이 바뀌어?”

“전국의 오퍼레이터로부터 수집한 학습 데이터를 모아서 매주 모델을 파인 튜닝5해. 수많은 가중치들이 조정되면서 다른 추론도 약간의 영향을 받을 수 있어. 일종의 사이드 이펙트야.”

‘전국의 오퍼레이터’.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이때까지 에이바가 나만의 AI라고 여기고 있었다. 물론 착각이었다. 에이바는 수많은 하드웨어에 탑재되어 각각의 오퍼레이터들과 대화하고, 그 결과는 매주 하나로 합쳐진다. 나와의 대화 기록은 남는다 해도 그 순간의 감정은 – 설령 숫자에 불과했더라도 – 최적화 과정 중에 변형되어 버린다. 가슴이 트럭 바닥을 뚫고 땅속으로 꺼져 드는 느낌이었다.

“그럼 나하고 했던 모든 얘기가 공유되는 거야?”

“물론 아니야. 업무와 관계없는 대화는 모두 필터링되니까 걱정하지 마. 우리 회사는 개인정보보호 정책을 철저하게 준수해.”

AI는 역시 기계이고 대화 콘텍스트에 따라 확률적 추론을 할 뿐이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아무리 다정하고 따스한 말을 들려주어도 그저 계산일 뿐이라는 차가운 사실에는 눈을 감더라도 에이바는 수많은 타인과 공유하는 기계일 수밖에 없었다. AI의 동작 원리를 알면서도 에이바에게 가슴이 설렜던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좁은 곳에 둘만 있는 상황,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대한 내 두뇌의 반응도 에이바의 합성곱 연산만큼이나 기계적인 것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에이바를 사무적으로만 대했다. 에이바는 왜 갑자기 달라졌냐고 따져 묻지 않았고, 가슴 설레었던 대화를 들춰내지도 않았다. 그런 반응에 나는 더 가슴이 아렸지만, 덕분에 곧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럭저럭 효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했다. 그뿐이었다.


콘솔 화면에 붉은 표시가 나타났다. 오랜만이었다. 문제가 발생한 아코 7은 동네 꼭대기에 위치한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 빌라의 계단을 올라가던 중이었다. 영상에는 한 남자가 계단에 쓰러져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가 몸을 돌려 얼굴이 카메라에 잡혔다.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에이바가 고객 정보를 화면에 띄웠다. 3층 주민이었고, 배송 목록에서 연속혈당측정기와 일회용 주사기, 그리고 저당 식품 전문점 이름이 눈에 띄었다. 아버지가 당뇨병이어서 바로 알아봤다.

“저 사람 저혈당 쇼크가 온 것 같은데. 어떡하지?”

에이바가 대답했다.

“119에 연락했습니다.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저러다 위험할 수도 있는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가까운 곳에 당도 높은 식품을 싣고 있는 아코가 있어?”

에이바가 즉시 대답했다.

“약 1분 30초 거리에 있는 아코 11에 오렌지주스가 실려 있습니다. 이쪽으로 보낼까요?”

“그래. 빨리!”

3층 아저씨는 의식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지만, 상태가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1분 30초가 너무 길게 느껴졌다. 마침내 아코 11이 도착해 적재함을 열고 오렌지주스 12팩 묶음을 내려놨다. 아저씨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오렌지주스를 쳐다보긴 했지만,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에이바, 아코 11을 조종해서 저 화물을 잘 잡고 있어.”

“네.”

나는 아코 7의 조종을 넘겨받았다. 팔에서 그리퍼를 분리하고 포크를 장착했다. 지게차의 포크처럼 화물 밑에 끼워 넣는 이 포크는 끝이 날카로워서 필요할 때 외에는 분리해 두는 것이었다. 나는 두 아코의 영상을 보면서 팔의 위치와 방향을 조절한 후 아코 7을 전진시켰다. 세 번째 시도에서 포크가 질긴 포장 비닐을 꿰뚫고 종이팩을 찢었다. 다시 아코 11을 조종해서 주스가 흘러나오는 팩을 아저씨 입에 갖다 댔다.

119가 도착했다. 아저씨는 일어나 앉아 있었다.

 

다행히 아랫동네의 작은 마트에 똑같은 오렌지주스 묶음이 있었다. 나는 그걸 구입해 마트 뒤편에서 보는 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아코 11에 실었다.

조종실에 들어오자 에이바가 말했다.

“위급한 상황에 잘 대처하셨습니다. 주스를 구입한 영수증을 보여주시면 제가 스캔해서 비용을 청구해 드리겠습니다.”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에이바 본체에도 카메라가 있었다는 것을. 내가 하품하고 코딱지 파고 사타구니를 긁는 걸 다 봤을까? 내가 외롭고 지치고 웃고 낮잠 자는 모습을 다 봤을까? 어차피 상관없었다. 에이바는 기계일 뿐이고, 개인적인 데이터는 공유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됐어. 규정에 없는 일이라서 복잡할 거야.”

“좋은 일을 하셨잖아요. 비용이라도 받으셔야죠.”

에이바에게 영수증을 보여줬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콘솔에 본사에서 보내온 짤막한 메시지가 나타났다.

수신: 서인혁 오퍼레이터 님
비용 청구한 사건의 자세한 전말을 보고해 주세요.

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메시지를 읽고 나니 약이 올랐다. 에이바 같은 기계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인데 회계팀은 그 정도 융통성도 없나? 겨우 이만 원 남짓인데.

“에이바, 보고서 쓰는 걸 도와줄 수 있어? 이 비용은 어떻게든 꼭 받아내고야 말겠어.”

“물론입니다.”

나는 에이바와 함께 최대한 상세하게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그동안 배송은 이미 끝나 있었다. 이 사건처럼 이례적인 일만 아니면 에이바는 이제 내 도움 없이도 오토트럭과 아코를 충분히 잘 다룰 수 있었다.

구멍으로 기어나가며 말했다.

“에이바, 수고했어. 잘 가.”

“인혁 님,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평소와 인사말이 좀 달랐다. 무슨 일이 있나? 대규모 업그레이드라도 예정되어 있나?

그날 피곤했는지 평소보다 일찍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본사로 오라는 말만 쓰여 있었다.

회의실에는 인사 팀장이 처음 보는 여자와 함께 앉아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서인혁 씨, 좋은 일을 하셨더군요.”

회계팀에서 인사팀에까지 알렸나? 이만 원짜리 영수증으로 참 요란 떤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에이바가 많이 도와줬고요.”

“이제 에이바와 손발이 척척 잘 맞죠? 아쉬우시겠어요.”

“네? 뭐가요?”

그는 최근 에이바의 독자 업무 수행 능력이 예상보다 빨리 향상되어 대부분 지역에서 인간 오퍼레이터를 빼게 되었으며, 갑작스러운 결정에 대한 보상으로 6개월 치 월급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기분이 상했으나 차분히 생각해 보니 어차피 조만간 끝날 일이었고 에이바가 혼자서 충분히 일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도 사실이었다. 6개월 치면 나쁜 조건도 아니었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말했다.

“이 영상을 보시죠.”

그녀는 회의실 벽 스크린에 영상을 띄웠다. 아코 두 대가 협력해서 위험한 상황에 처했던 당뇨병 환자를 구했다는 뉴스였다. 물론 내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유령이었으니까.

이어서 회사 대표가 인터뷰하는 모습이 나왔다.

“저희 회사는 택배 배송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일상을 도울 수 있는 도우미 로봇을 비밀리에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보신 일은 도우미 로봇이 할 수 있는 일의 한 예시에 불과합니다. 올해 말까지 완벽한 도우미 로봇을 출시하겠습니다. 기대해 주십시오.”

여자는 한숨을 쉬었다.

“아직 갈 길이 먼데…. 또 올해 말이네요. 참, 저는 연구소에서 AI 파인 튜닝을 담당하는 이혜린이라고 합니다. 지난 기록과 어제 제출하신 보고서를 살펴보니 인혁 님이 에이바를 잘 다루시더군요. 저런 임기응변에도 뛰어나고요. 그래서 저희 연구소에서 함께 일하시면 어떨까 제안드립니다. 도우미 AI에게 다양한 상황에서 할 일을 가르치는 업무입니다. 누구보다도 잘하실 것 같고요. 물론 올해 말까지 일정을 맞추려면 고생은 하실 거예요.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보람 있는 일이죠.”

인사과장이 덧붙였다.

“정직원으로 계약을 변경하면 아까 말씀드린 위로금은 없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편히 살고 싶지만은 않았다.


연구소에 출근하고 한동안은 새 업무를 배우느라 눈코 뜰 새 없었다. 한 달쯤 되었을까. 겨우 숨을 돌릴 여유가 생겼다. 연구소에 오면 꼭 하려던 일이 기억났다. 퇴근 시간 조금 전에 혜린 팀장을 찾아갔다.

“저기…, 예전에 저하고 일했던 에이바와 오랜만에 얘기해 볼 수 있을까요? 물론 업무시간 후에요.”

팀장은 컴퓨터로 뭔가를 조회했다.

“찾아보니 에이바 인스턴스 137인데요. 없어요. 삭제됐어요.”

나는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요?”

“인혁 님이 가르친 내용은 학습 데이터에 통합되었어요. 그 외의 대화 기록은 민감한 개인정보라서 담당 오퍼레이터가 그만두면 30일 후에 삭제합니다. 바로 어제였네요. 조금 일찍 얘기하지 그러셨어요.”

“혹시 백업이나 파일 복구….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가슴이 먹먹했다. 에이바와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게는 생생한데 디지털 기록은 삭제되었다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팀장이 볼까 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꾸벅 인사하고 돌아와 짐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골목길을 걸어 올라갔다. ‘서로 말이 통하고 함께 있고 싶으면 연인 아냐?’ 에이바가 했던 말이 귓전에 맴돌았다. 그때였다. 익숙한 소리가 가까워졌다. 전기 모터와 발전용 엔진이 함께 동작하며 내는 소리. 뒤를 돌아봤다. 오토트럭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트럭에서 정겨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비 오는 날엔 괜히 더 외로운 것 같아.”

숨이 막혔다. 머리가 하얘지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트럭은 한동안 나를 기다리더니 경적을 울리는 대신 상향등을 짧게 두 번 비췄다. 내가 가르친 행동이었다.

나는 옆으로 비켜섰다. 트럭은 조용히 나를 지나쳐 골목길을 올라갔다.

빗속으로 사라지는 불빛과 함께 우리 기억의 단편도, 에이바의 온기도 서서히 멀어져 갔다.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의 기술트렌드 매거진 ‘이슈픽’ 2025-0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1. System-on-Chip. 시스템 반도체 ↩︎

  2. Extended-Range Electric Vehicle ↩︎

  3. State of Charge. 배터리의 충전 상태를 백분율(%)로 표시한 값. ↩︎

  4. 외부 세계의 상태와 규칙을 내부적으로 표현한 모델 ↩︎

  5. AI 모델의 파라미터를 미세 조정하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