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블리비언

이혜원 박사는 창 너머로 지구가 서서히 차오르는 모습을 바라봤다. 시리도록 푸른 대양과 소용돌이치는 구름이 느릿하게 흘러갔다. 그 거대한 행성의 윤곽을 갸냘픈 대기권의 띠가 감싸고 있었다. 그것은 붉은 노을빛으로 타오르다 선명한 푸른색으로 빛나고, 희미한 보라와 남색으로 이어져 칠흑 같은 우주 속으로 사라지는 아름다운 빛의 막이었다. 이전에도 수십 번은 본 광경이었지만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아리면서도 먹먹하게 벅차오르는 느낌은 여전했다.

자세 제어 분사가 섬세하게 각도를 조정할 때마다 선체가 긴장한 듯 살며시 떨었다. 조종사의 차분한 목소리가 잡음 너머로 들려왔다. 몇 분 후면 재진입이다. 작열하는 열기, 격렬한 플라스마, 통신 두절. 그러나 그녀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그토록 값비싸게 얻은 궤도 에너지를 다시 열로 흩뿌리는 과정이 아니라, 그 후에 기다리고 있을 만남이었다. 미래 재단에서는 아무런 설명 없이 높은 중요도로 표시된 메시지 한 줄만을 보냈다.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지구로 귀환 요망. 이사장님 미팅 요청.’ 실험실 사고 이후 재단에서 연락할 거라고는 예상했었지만 강 이사장을 만나라고 할 줄은 몰랐다.

태블릿에서 강현우를 검색했다. 세계 최대의 로봇 회사인 오블리비언 그룹의 회장이자 그녀의 연구비를 댄 미래 재단의 이사장. 천재적인 엔지니어 출신, 은둔하는 갑부로 누구보다도 유명한 한국인이었으나 그녀는 그를 잘 몰랐다. 읽을 가치가 없는 가십성 글들이 많았다. 그가 비밀 연구실에 외계인을 가둬두고 있다던지, 15년째 한 여인만 짝사랑하고 있다는 기사에서는 실소가 터져나왔다. 좀 읽다가 주요 뉴스만 보이게 하고 시간 순으로 정렬했다.

첫 번째 기사는 그가 오블리비언을 창업하기 전이었다. 달 뒷면에서 발견한 LQX-1 월석을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LLNL)1에서 실험하던 중 폭발사고로 인명피해가 발생했었다. 당시 초전도 자기장·광학 간섭계를 강현우가 대표였던 헬리온 시스템즈에서 공급했었는데, 그 장비는 요구에 맞게 동작했으며 잘못은 실험을 설계한 LLNL 측에 있었다는 기사였다. LLNL의 LQX-1 실험과 사고에 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강현우가 관련 있는 줄은 몰랐었다.

두 번째 기사는 투자유치 때였다. 강현우는 LLNL 사고 후 헬리온을 매각하고 잠적했다. 알고 보니 그는 반도체와 로보틱스 분야의 최우수 인력과 함께 2년간 스텔스 모드로 비밀리에 연구를 진행했었다. 당시 오블리비언 로보틱스의 설명회에 참석했던 한 벤처캐피털 관계자는 그가 “매우 혁신적이고 도전적인 미래 기술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을 갖고 있었고, 이미 다수의 핵심 특허를 출원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그 후 오블리비언 로보틱스가 내놓은 로봇은 투자자와 대중을 시연으로 현혹하기만 했던 당시의 다른 로봇들을 훌쩍 뛰어넘는 놀라운 성능을 발휘했다. 경쟁사들은 오블리비언의 로봇을 구입해 분석한 후 자신들보다 10년 이상 앞선 기술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블리비언 로봇의 온 디바이스 AI2는 뉴로모픽 프로세싱 기능이 메모리와 통합된 혁신적인 3D 수직적층 메모리3로 구현되었는데, 오블리비언은 이 3D N-PIM4 반도체의 생산 수율을 올리기 위해 KSMC5와 공동으로 지능형 측정분석 융합 장비6까지 개발해냈다.

로봇의 구동계 또한 혁신적이었다. 다이렉트 드라이브7가 가능한 프리오셉티브8 멀티디스크 축방향 플럭스 모터9를 탑재해 역구동성10과 회생11 기능을 동시에 구현해냈다. 고효율의 GaN 기반 인버터와 SiC 기반 DC-DC 컨버터12가 모터와 일체형으로 통합되었고, 로봇의 외골격이 배터리의 하우징 역할을 겸하는 셀-투-스켈레톤(cell-to-skeleton) 방식의 고전압 배터리로부터 전력을 공급 받았다. 그 결과 로봇은 환경과 유연하게 상호작용하는 놀라운 조작성과 고수준의 에너지 효율을 달성할 수 있었다.

혜원은 태블릿에서 고개를 들었다. 선체가 떨리기 시작했다. 미세한 진동은 급격히 커져갔고, 초음속으로 선체에 부딪히는 공기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창밖은 푸른 대기 대신 불길한 주황빛 플라즈마로 가득 찼다. 눈을 감았다. 진동과 빛이 며칠 전 실험실의 기억을 불러냈다.

 

우주 정거장의 미소중력 환경에서 LQX-1 주변의 위상 결함을 관측하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펌프 레이저의 위상을 맞추는 순간 진공 챔버 안에서 LQX-1을 둘러싼 링 간섭계가 요동쳤다. 그래프는 제어 불능의 파동을 그리며 치솟았고, 기계는 마치 금속이 찢어질 듯 날카로운 비명을 냈다. 비상중지 버튼을 내려쳤지만 장치는 응답하지 않았다. 실험실 전체가 부서질 듯 덜컹거렸고 붉은 섬광이 벽에 현란한 패턴을 비쳤다.

그때였다. 곁에 있던 조수 로봇 노바가 움직였다. 노바는 실험 장비 앞에서 멈추더니 마치 마지막 인사를 하며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려는 듯 돌아봤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하고 안타까움 속에서 노바를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다. 우주 정거장과 사람들을 구하려면 무슨 시도라도 해야만 했다.

노바는 차폐문의 레버를 잡아 당겼다. 진공으로 압착된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노바는 양팔로 문 가장자리를 움켜쥐고 발을 장비에 걸쳤다. 노바가 최고 출력을 내자 그의 팔과 몸체가 삐걱였고 서서히 문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볼트가 뜯겨 나가고 금속판이 우그러졌다. 마침내 저항하던 문이 열리자, 실험실 공기가 거친 폭발음과 함께 챔버 안으로 들이쳤다. 노바는 곧장 장치의 중심부로 몸을 던졌다. 그는 뒤틀린 팔로 고정 볼트를 풀어내고, 자신의 몸체를 LQX-1과 초전도 코일 사이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만! 이제 거기서 나와!”

혜원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노바의 몸체가 뜨겁게 빛나며 에너지 장이 붕괴했다. 붉은 섬광이 사그라들고, 요란한 경보음이 하나씩 멈췄다. 자욱한 연기가 공조장치로 빨려들어갔다. 챔버 안에는 혜원의 오류를 대신 책임지고 타버린 기계 동료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뛰어왔다.

 

눈을 떴다. 눈시울이 축축했다. 창밖에서는 어느덧 플라즈마가 사라지고 흰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노바.’

뺨에 따스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블리비언 로보틱스 타워는 그 이름처럼 현실감을 망각하게 만드는 건축물이었다. 비틀리며 솟아오른 유선형의 외골격은 마치 거대하고 기괴한 로봇의 뼈대처럼 보였다. 미래 재단은 이 건물의 40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혜원은 안내 로봇을 따라 복도를 걸었다. 사방의 벽은 빛을 흡수하는 무광의 검은 패널이었고, 유일한 광원은 바닥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푸른빛이었다. 연구과제 심사 때도 왔었는데 그때는 그저 인테리어가 고급스럽다고만 느꼈었다. 강현우 이사장을 일대일로 마주해야 하는 지금은 건물 전체에서 그의 압도적인 권위가 스며나와 그녀를 압박하는 것 같았다.

안내 로봇이 다가가자 회의실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통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도시의 소음이 완벽하게 차단된 공간, 그 고요함의 중심에 한 남자가 서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돌아섰다. 뉴스에서 본 강현우였다. 사진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날카로운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에서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은 사진이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혜원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이혜원 박사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박사님. 앉으시죠.”

그가 예상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준비해 온 말을 꺼내려니 가슴이 뛰었다.

“이사장님. 먼저…, 우주 정거장에서 발생한 사고에 대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가 더 철저하게 이론을 검증하고 조심스럽게 진행해야 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질책이든, 연구 중단 통보든, 어떤 처벌이라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현우는 아무 말 없이 혜원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것은 화가 나거나 질책하는 시선이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긴장한 듯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마치 오랫동안 알아온 사람을 보는 듯한 친근한 눈빛이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이 박사님.”

“그래도 그 사고는 전적으로 제 책임—”

“박사님이 막을 수 없었을 겁니다. 모든 것은… 운명이었습니다.”

운명? 의외였다. 최첨단 기술 회사를 만들어 세계적으로 성공시킨 사람이 운명을 들먹이다니. 머뭇거리다가 생각해뒀던 다른 말을 꺼냈다.

“미래 재단을 설립해 저 같은 연구자들을 후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훌륭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훌륭하다고요? 자괴감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뿐입니다.”

자괴감이라고? 이번엔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강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 오시죠.”

그는 회의실 문으로 향했다. 혜원은 얼떨결에 그를 따라나섰다. 그들은 아까의 그 어두운 복도를 지나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강현우가 패널에 손을 대자, ‘B-12’라는 숫자가 붉게 빛났다. 지하 12층. 건물 로비의 안내판에는 지하 10층까지만 표시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소리 없이 하강하는 동안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좁은 공간에서 그의 숨소리가 떨렸다. 그 역시 그녀만큼이나 긴장하고 있었다.

‘띵.’

문이 열리자 나타난 것은 눈부시게 하얀 복도였다. 지하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복도를 걸어갔다.

강현우가 돌아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박사님, LQX-1이 대체 뭔가요?”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했지만, 혜원은 친구와 가족에게 LQX-1를 설명해야 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달 궤도 위성이 정밀 중력 지도를 만들던 중, 이상한 지점을 발견했습니다. 그게 아마 20년 전 쯤이었을 겁니다. 그곳에서 JPL이 찾아낸 것이 Lunar Quasicrystal eXotic-1, 즉 LQX-1입니다. 이 특이한 월석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많은 과학자들은 LQX-1의 준결정 구조 속에 미세한 우주 끈13의 루프가 갖혀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주 끈이란—”

“저도 거기까진 압니다. 우주 팽창 직후의 상전이 과정에서 생겨난 공간의 위상수학적 결함이죠. 제가 궁금한 것은…. 먼저 보여드리는 편이 낫겠군요.”

복도 끝에 이르자 경비 로봇과 거대한 강철문이 있었다. 로봇은 강현우를 알아보고 깍듯하게 인사하며 비켜섰다. 그는 문 옆의 스캐너에 자신의 눈과 손바닥을 차례로 인식시켰다. 육중한 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는 문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녀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엑스레이 나노단층촬영장치, 집속 이온빔 주사전자현미경, 질량분석기 – 알아볼 수 있는 장비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벽을 따라 수많은 정체불명의 장비들이 늘어서 있었고, 중앙에는 널찍한 테이블 위에 온갖 첨단 공구와 시료들, 그 옆에는 여러 대의 고성능 워크스테이션이 커다란 홀로그램 디스플레이와 함께 배치되어 있었다.

“요즘은 안 쓰는 시설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그러고보니 이 큰 공간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강현우는 거대한 연구시설 구석의 별도로 구획된 방으로 들어갔다. 조명이 켜지고 뒤에서 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그는 한쪽 벽의 반투명 강화 유리문을 열었다. 내부의 선반에는 불탄 자국이 있는 기계 부품들, 회로 기판, 로봇의 골격과 액추에이터들이 마치 박물관의 전시품처럼 은은한 조명 아래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박사님과 함께 일했던 로봇입니다. 노바라고 부르신다면서요?”

혜원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서슴없이 자신을 희생했던 로봇. 함께 복잡한 수식을 풀고, 논문과 과제 지원서를 작성하고, 실험 장비를 세팅하고, 농담을 주고 받고, 적적할 때 친구가 되어줬던 바로 그 로봇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제가 사고 이후 첫 우주선으로 왔는데요. 노바의 잔해가 어떻게 저보다 빨리 와 있죠?”

그러고보니 사고 현장에서 찾지 못했던, 메모리 칩이 들어있는 머리 부분도 있었다. 그녀는 메모리 칩을 찾아 노바의 기억, 그녀와의 추억을 복구해내고 싶었었다. 물론 그녀의 월급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이 들었겠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쳐다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 잔해는 15년 전에 LLNL 사고 현장에서 발견한 것들입니다.”

“네? 노바의 잔해라면서요. 아니, 그 말은…. 설마….”

혜원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15년 전 LLNL 사고. 그리고 눈앞에 있는 노바의 잔해. LQX-1. 시대를 앞서간 오블리비언 로보틱스. 퍼즐 조각들이 믿기 어렵고 잔인하면서도 정교한 그림으로 맞춰지고 있었다.

“…말도 안 돼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믿을 수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치다가 벽에 부딪혔다.

“이해합니다. 저도 15년이 걸렸으니까요.”

그는 혜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질문을 던지듯 담담하게 물었다.

“이 박사님. 물리학자이시니까 설명하실 수 있으시겠죠? 어떻게…, 며칠 전 지구 궤도에 있었던 물체가 15년 전 리버모어에 나타날 수 있었던 거죠?”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과학자로서의 본능이 깨어났다. 그녀의 뇌가 긴장한 상태에서 미친 듯이 가설을 세우고 추론했다. LLNL 사고 보고서. 자신의 실험 설계. 그리고 우주 끈. 노바. 빈틈이 많았지만 하나의 설명만이 가능했다.

“두 실험 모두… LQX-1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LLNL에서는 초전도 자기장을 이용했고, 저는 원자 간섭계로….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두 실험 모두 우주 끈 루프에 막대한 에너지를 가했습니다. 우주 끈은 이론적으로 시공간을 왜곡시킬 수 있습니다. 어쩌면 시공간의 서로 다른 두 지점에서 동일한 우주 끈 루프에 가해진 에너지가 두 지점 간에 닫힌 시간꼴 곡선14을 형성했을지도 모릅니다."

닫힌 시간꼴 곡선. 시간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이론상의 경로. 그녀의 괴짜 은사는 나무 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가지가 아래로 휘어 다시 줄기 속으로 파고드는 모습을 떠올리라고 했었다. 그저 SF 소설 속에서만 보던 단어를 지금 자신의 입에 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역시 그랬군요. 이걸 발견했을 때, 저는 다른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헬리온을 매각하고, 그 자금으로 각 분야의 최고 엔지니어들을 모아 부품들을 분석했습니다. 외국 정부의 비밀 연구소에서 만든 프로토타입이 아닐까 의심했죠. 하지만 아무도 이걸 되찾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기술을 재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우주 정거장의 사고처럼 우리의 도전 역시 정해진 역사였을 뿐이었네요. 전 지난 15년간 매일 밤 자괴감과 두려움에 잠을 설쳤습니다. 다음 날 아침 누군가 나타나 자신의 기술이라고 주장할까 봐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아무도 이 기술을 처음으로 만들어내지 않았습니다. 한 기술이 스스로 자신의 원형이 될 수 있을까요?"

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트스트랩 역설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녀는 다시 선반을 들여다봤다. 노바의 잔해이자 노바의 설계도였다. 시간의 루프 속에서 기술은 자기 자신을 낳고 있었다. 만약 이 모든 일이 정해진 운명이었다면, 이런 기술이 시간을 앞당겨 인류에게 선사된 것 역시 운명이었을까? 앞으로도 이런 일이 또 일어날 수 있을까?

문득 궁금한 점이 있었다.

“저, 그런데 어떻게 이 잔해가 노바의 것이라고 확신하셨죠? 노바와 같은 모델의 로봇은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텐데요. 어떻게 제 실험과 LLNL의 실험이 관련된 줄 아셨어요?”

“며칠 전 우연히 우주 정거장 사고에 관한 뉴스를 봤습니다. 박사님 얼굴이 잠깐 나왔었죠.”

강현우는 다시 한번 혜원을 빤히 쳐다봤다. 그의 얼굴에서 이유 모를 오래된 슬픔이 읽혔다. 그가 말을 이었다.

“이 사람을 꼭 만나야겠다고 하자, 비서가 알아보더니 우리 재단이 지원한 연구 과제의 책임자라고 하더군요.”

그는 힘없이 책상으로 걸어가 앉았다. 컴퓨터를 켜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잔해에서 발견한 메모리 칩에서 일부 데이터를 복구할 수 있었습니다. 연구실을 배경으로 어떤 사람이 찍힌 사진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이 로봇을 개발한 천재 연구원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술의 벽에 부딪힐 때마다 꺼내보며 ‘처음부터 만든 사람도 있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했습니다. 언제라도 그 사람이 나타날까봐 초조하면서도 스승으로 존경했고, 부품 하나하나를 분석할 때마다 그 아름다운 설계에 매료되었습니다. 저 슬픔 뒤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지 궁금하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다 어느새 그 사람은 제 가슴 속 깊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없이 모니터를 돌려 보여줬다.

혜원의 얼굴이 있었다. 그녀를 위해 희생했고, 자기 자신이 존재할 수 있도록 과거로 돌아갔던 로봇, 노바를 향한 그녀의 사랑과 슬픔이 선명하게 담긴 얼굴이.


  1. Lawrence Livermore National Laboratory. 미국 에너지부 산하의 국립연구소. ↩︎

  2. On-Device AI 기술동향 기사 참조 ↩︎

  3. 차세대 수직적층형 메모리 기사 참조 ↩︎

  4. 3D Neuromorphic Processing-in-Memory. 작중 기술명. ↩︎

  5. Korea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 TSMC를 패러디한 작중 가상의 파운드리 회사 ↩︎

  6. 지능형 측정분석 융합 공정-장비 기술동향 기사 참조 ↩︎

  7. Direct Drive. 감속기 없이 부하를 직접 구동하는 방식. 마찰과 백래시를 최소화시킬 수 있다. ↩︎

  8. Proprioceptive. 액추에이터가 토크·위치 등 상태를 내장 센서로 직접 측정해 제어하는 방식을 의미 ↩︎

  9. Multidisc Axial Flux Motor. 디스크 모양의 로터와 스테이터 사이에 자속이 축 방향으로 형성되는 전기 모터. 높은 토크 밀도와 공간 효율성을 가지며, 여러 디스크를 적층하여 출력을 더욱 높일 수 있다. ↩︎

  10. Backdrivability. 외력이 토크를 역으로 전달할 수 있는 성질. 로봇이 환경과 안전하고 유연하게 상호작용하기 위해 중요하다. ↩︎

  11. Regeneration. 동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운동 에너지나 제동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회수하는 기능. 배터리 충전에 활용되어 에너지 효율을 높인다. ↩︎

  12. 차세대 전력반도체 기사 참조 ↩︎

  13. Cosmic string. 빅뱅 직후 대칭성 붕괴 과정에서 형성되었을 수 있는 공간 속의 1차원 위상적(topological) 결함. 만약 존재한다면 굉장히 가는 선의 형태를 가지며, 어마어마한 밀도를 지녀 중력 렌즈 효과를 일으킬 것으로 예측된다. ↩︎

  14. Closed Time-like Curve. 일반상대성이론의 해에서 등장하는 특수한 개념으로, 시공간이 고리처럼 휘어져 과거의 한 시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경로를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