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장막 너머로

커버

정우진 팀장은 임원 회의실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가쁜 숨을 가다듬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렇게 급하게 불려 올 만한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묵직한 문을 밀어 열고 회의실에 들어섰다. 그의 상사인 백준호 다목적차량1 사업부장 외에 홍보실장, 법무실장, 대외협력실장 등 평소 볼 일 없던 고위 임원들이 흑갈색 원목 테이블 주위에 둘러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백 본부장이 그에게 옆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하면서 스크린을 향해 말했다.

“의장님, 이쪽이 말씀드린 정 팀장입니다. 정 팀장, 유엔 산하의 글로벌재난대응기구, 즉 GDRA의 사이토 의장님이시네.”

정 팀장은 스크린에 비친 처음 보는 외국 사람에게 얼떨결에 인사한 후 개인 모니터의 AI 회의 지원 기능을 이용해 현재까지 요약된 회의 내용을 빠르게 훑어봤다. 태평양의 한 섬에서 화산 폭발이 일어나 주민 수천 명이 위험에 처했는데, 짙은 화산재 구름 때문에 구조 항공기가 접근할 수 없었다. GDRA는 주민들을 긴급 대피시킬 방법을 찾던 끝에, 마침 미래모빌리티의 다목적차량을 실은 무인 수송선 다이달로스호가 가까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GDRA는 이 선박에 주민들을 태울 수 있는지 미래모빌리티에 문의해 온 것이다. GDRA는 회사가 입을 금전적 피해를 보상하겠다고 제안했고, 회사는 기술적으로 가능만 하다면 돕는 데 동의했다.

“정 팀장, 주민들을 태울 공간을 마련하려면 먼저 천여 대의 다목적차량을 배에서 하선시켜야 합니다. 차량이 스스로 배에서 내려와 접안 시설 주변 공터에 질서 있게 정렬할 수 있는지가 관건입니다. 현지 상황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고, 화산재 구름 때문에 GPS나 원격조종이 동작할지도 미지수입니다. 가능할까요?”

정 팀장은 다목적차량을 여러 용도에 적용하기 위한 서비스 소프트웨어의 개발을 맡고 있었다. 이 차량은 소프트웨어로 기능이 정의되는 SDV2 차량으로서 단기간에 새로운 기능을 개발해 바다 한가운데에서도 적용시킬 수 있다. GPS 신호를 수신할 수 없는 지하에서도 자율주행할 수 있는 차량이긴 하지만, 사전에 제작된 지도가 필요했다. 게다가 화산재가 도로를 덮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때 스크린에 섬의 상황을 보여주는 그래픽이 나타났다. GDRA의 드론이 잿빛 구름 밑으로 하강해 지표면을 근접 촬영하면서 영상을 전송하고 있었다. 이미 섬 전체의 도로가 군데군데 파손되었고, 용암이 흘러내리는 곳도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화면이 흔들리더니 급격히 고도가 낮아지는 장면을 끝으로 드론 영상은 끊어졌다. 정 팀장은 주민들의 위치와 항구의 거리를 가늠해 봤다.

“주민들은 어떻게 항구까지 이동하죠? 수십 킬로미터는 더 되어 보이고, 길이 막힐 수도 있을 텐데요.”

정 팀장이 질문하자 사이토 의장의 답변이 통역되어 들렸다.

“어쩔 수 없습니다. 주민들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머릿속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하지만 정 팀장은 망설였다. 괜히 무리하게 시도하려다가 실패하면 회사가 좋은 일 하려고 나섰다가 오히려 이미지만 나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민들이 자력으로 항구까지 오는 것은 너무 위험해 보였다.

“시간이 얼마나 있나요?”

“다이달로스호는 약 25시간 후면 항구에 도착합니다. 주민들에게는 그 후 하루 이틀 정도밖에 시간이 없습니다.”

정 팀장은 결심했다. 시도해 볼 만한 일이었다. 본부장을 쳐다봤다.

“저 차량들을 이용해 주민들을 구출하겠습니다. 차량 중 일부는 파손될 수도 있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그 후의 일은 눈코 뜰 새 없이 진행되었다. 먼저 자회사인 미래우주개발로 이직한 동료 팀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미래우주개발은 차세대 무인 월면 로버3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그 로버는 다이달로스호에 실린 다목적 차량과 동일한 SDV 플랫폼을 사용하고 있었다. 두 팀의 엔지니어들은 AI 프로그래머4와 함께 로버의 서비스 모듈을 다목적 차량에 맞게 수정했다. 또한 섬의 환경에서 테스트하기 위해 디지털트윈5 시스템을 활용했다. 정 팀장이 신입 사원이었을 때는 상상할 수도 없는 속도로 개발하고 있음에도 섬의 상황이 예상보다 빨리 악화될까 봐 초조했다.

항구에 도착한 다이달로스호가 램프6를 부두에 내려놓았다. 땀내와 열기로 후끈한 회의실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대형 스크린에는 다이달로스호의 외부 카메라 영상과 함께 섬의 지도가 나타났다. 항구 위치에 표시된 ‘D’라는 아이콘으로부터 나타난 녹색 점들이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량들은 차량 간 통신을 이용해 메시 네트워크7를 구성하고 선두 차량이 보내오는 도로 상황 정보를 뒤쪽으로 전달해 가며 줄지어 이동했다. 회의실에 모인 엔지니어들은 단 하루 만에 기능을 완전히 탈바꿈시킨 다목적차량들이 잿빛 장막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다목적차량에 탑재된 월면 탐사용 센서 퓨전 알고리즘8과 SLAM9 기술이 돌더미와 진흙 사이로 나아갈 경로를 계산해 냈다. 그러다가 뱀처럼 움직이던 녹색 점의 행렬이 갑자기 멈춰 섰다. 다리가 무너지면서 선두의 차량 두 대가 추락한 것이다. 지나온 갈림길에서 가장 가까운 차량이 선두 역할을 넘겨받은 구조대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거 지역에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는 경로를 찾기 위해 여러 갈래의 길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다섯 대의 차량을 더 잃었다. 마을에 도착한 차량들은 수정된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으로 주민들에게 탑승을 안내했고, 돌아오는 중에는 다른 차량의 가족과 통화 기능도 제공했다.


마침내 주민들을 실은 마지막 차량이 갑판으로 올라왔다. 다이달로스호는 램프를 접어 넣고 최고 출력으로 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고고도(高高度) 드론이 전송하는 영상은 점점 높이 치솟는 연기 기둥이 섬 전체를 뒤덮어가는 모습을 화면 가득 보여줬다. 이제 세 시간만 있으면 구호물자를 실은 고속 무인 위그선10이 도착할 예정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정 팀장은 동료들을 향해 외쳤다.

“여러분, 우리가 해냈습니다! 3,271명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회의실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그때 누군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환호성이 회의실을 가득 메웠다. 동료들은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기쁨을 나눴다. 피로와 긴장감이 가득했던 그들의 얼굴은 어느새 성취감과 자부심으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정 팀장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엔지니어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평생 기억에 남을 가장 자랑스러운 일을 성취해 냈다는 생각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의 기술트렌드 매거진 ‘이슈픽’ 2024-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1. 향후 소프트웨어에 의해 새로운 기능을 손쉽게 제공할 수 있는 SDV 기술과 구조적 자유도를 극대화하는 스케이트보드 플랫폼에 의해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맞춤형 차량(PBV; Purpose-Built Vehicle)이 활성화될 것으로 예측된다. ↩︎

  2. 소프트웨어 정의 차량(SDV; Software-Defined Vehicle)은 출시 이후에도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통해 기능이 지속적으로 향상될 수 있는 차량을 의미한다(주제 1. 미래차 산업 패러다임 변화에 따른 SW 기술 개발 동향) ↩︎

  3. 달 표면 탐사 차량으로서 기지 건설과 자원 탐사 및 채취 등에 필요하다. GPS가 없고 거친 지형에서 복수의 로버가 상호 간 직접 통신하면서 자율적으로 동작하여 충돌을 회피하고 정보를 공유할 뿐 아니라 작업을 분배하고 협업할 수 있어야 한다(주제 3. 행성 탐사용 로버 소개 및 기술 발전 전략). ↩︎

  4. 소프트웨어의 일부분을 생성하거나 수정·개선하는 AI는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전체 프로젝트를 독자적 또는 인간과 협업(human-in-the-loop)하여 완성할 수 있는 SW 에이전트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

  5. 현실 세계의 실시간 데이터를 이용해 실제와 같은 가상 환경을 구현함으로써 현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기술이다. ↩︎

  6. 선박에서 차량이나 화물을 싣고 내리는 데 사용되는 경사로 또는 다리 ↩︎

  7. 메시 네트워크(Mesh Network)는 중앙 집중식 허브나 라우터 없이 각 노드가 서로 직접 연결되어 구성하는 분산형 네트워크 구조를 말한다. 하나의 노드에 장애가 발생해도 네트워크 전체가 중단되지 않으며, 노드들이 서로의 신호를 중계하여 넓은 범위를 커버할 수 있다. ↩︎

  8. 센서 퓨전 알고리즘(Sensor Fusion Algorithm)은 카메라, 라이다(LiDAR), 레이더, 가속도계 등 여러 센서에서 얻은 데이터를 통합하여 더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얻는 기술이다. ↩︎

  9. SLAM(Simultaneous Localization And Mapping)은 알려지지 않은 환경에서 로봇이나 자율주행차량이 자신의 위치를 파악(localization)함과 동시에 지도를 작성(mapping)하는 기술이다. ↩︎

  10. 위그(WIG; Wing-in-Ground effect)선은 바다 위를 낮은 높이로 비행하는 선박이다. 날개와 지면 사이의 공기 압력이 높아지는 지면 효과에 의해 일반 항공기보다 효율이 높고 선박보다 높은 속도로 이동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