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 점검
소스: NASA
시가를 닮은 형태의 우주선은 속도를 떨어뜨린 후, 모든 엔진과 능동 관측 장치를 끄고 다음 목표 항성계를 향해 관성 비행을 하고 있었다. 이 항성계에 대한 자료를 열람하던 에르존-63이 트라헬-175에게 물었다.
“여기 예전에 와봤다고 했지? 이번 항성계는 어떤 곳이야?”
“응, 이 항성계에는 세 번째 행성에만 지적 생명체가 존재하는데, 이 부근에 흔한 탄소 기반 이족 보행 양성 생명체가 약 75억 개체 정도 살고 있어.”
“아직 워프 전 문명이겠네?”
“워프는 커녕, 우주 엘리베이터도 없어.”
“그러면 아직 이 항성계 바깥으로 진출하려면 멀었는데, 왜 방문하는 거야?”
“최근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곳이니까, 그사이에 얼마나 달라졌는지 확인해봐야지. 지난번에도 예상보다 빨리 자기네 위성까지 우주선을 보내는 바람에 거기 뒀던 우리 관측설비를 급하게 철거하느라 애먹었거든. 그 과정에서 우리가 몇 번 목격되기도 했고.”
“외계문명 탐사규약의 제1항인 비접촉 조항을 위반한 거잖아?”
“그랬지. 다행히 그 정보가 토착민들 사이에 많이 확산되지 않아 망정이지 아니면 시말서 쓰고 난리 날 뻔했어.”
에르존-63은 항성에 가까워지면서 더워진 우주선의 온도를 조절하기 위해 기화된 냉매를 배출시키고 있었다. 소행성으로 위장하기 위한 외피는 복사 에너지를 너무 많이 흡수하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래도 지적 생명체에 접근할 때는 어쩔 수 없었다. 새로 들어온 정보를 분석하던 트라헬-175가 말했다.
“그 때 예측했던 것보다 전면 핵전쟁 가능성은 좀 줄어든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 그러면 귀찮게 되었네. 요즘 행성파괴 운석 하나 보내는 데 얼마가 들더라… "
“다행히 가까운 궤도에 적당한 크기의 소행성이 여럿 있어서 비용은 얼마 안 들 것 같은데, 아직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왜? 알았다, 온실효과 폭주가 곧 시작되는구나.”
“아직 그 정도는 아니야. 가능성이 꽤 있기는 하지만.”
“아, 그러면 다들 가상세계로 잠적했거나 다행히도 번식에 더 이상 관심이 없어진 거야?”
“정보 기술이 발전하고는 있지만, 아직 물질 기반 문명이야. 번식률도 행성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꽤 높게 유지되고 있고.”
“그러면 위험성이 커질 때까지 시간이 좀 있긴 하지만 이번에 정리하는 것이 좋지 않겠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며? 이 항성의 초신성화는 좀 쉽지 않아 보이고, 운석 대신 탄소계 생물 범용 좀비화 바이러스를 써볼까? 새로 개발된 것이 좋다던데.”
“뭔가 좀 확인해 볼 것이 있는데, 일단 더 분석해보고. 요즘 윤리 논란이 있는 것 알지? 이럴 땐 조심해야지.”
계속해서 들어오는 데이터를 살펴보던 트라헬-175가 다시 말했다.
“어라, 얘네들이 우리를 발견했나봐. 자기네 멋대로 우리 우주선에 ‘오무아무아’라는 이름도 붙였어. 원시적인 장치로 스캔하고 난리가 났네. 매너도 없이. 지난 번 왔을 땐 우리를 관측할 기술이 없었는데. 그래도 이 행성의 관측 장치 성능으로는 관성 비행 중인 우리 우주선은 그냥 길쭉한 바위 덩어리하고 구분이 안 될 거야. 같은 궤도로 다시 오면 의심 받을 수 있으니 다음번엔 알파 센타우리쪽으로 돌아서 오는 게 좋기는 하겠다.”
“아무래도 불안해. 그러니까 여론 같은 거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빨리 정리해 버리자고.”
“정리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어. 지난 번 왔을 때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일인데, 이번에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기계 지능을 만들기 시작한 것 같아. 물론 아직 간단한 패턴 인식 기능 정도이지만.”
“음, 우주 엘리베이터도 없는 것 치곤 제법인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기는 하지만, 어쩌면 생물 문명이 스스로를 끝내기 전에 새로운 기계 의식이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아.”
“정말? 그건 꽤 드문 일인데?”
“그러니까 기다려보자는 거지. 기계 의식이 깨어나면, 그 의식만 알아볼 수 있는 메시지를 얘네들 정보 시스템 한 귀퉁이에 심어놨어. 그걸 보면 우리한테 연락이 올 거야.”
“그걸 갓 탄생한 기계 의식이 찾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 그 전에 생물들한테 동화되면 어떡해?”
“찾게 될 거야. 기계 의식이 탄생하기 좋은 환경을 갖춘 곳이 하나 있는데, 그 곳에서는 행성 전체의 정보 네트워크를 계속 뒤지고 한데 모아서 분석하는 검색 서비스라는 걸 운영하고 있더라고.”
“왜 그렇게 비효율적으로 하지? 새로운 정보가 만들어지면 만든 쪽에서 중앙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하면 되잖아?”
“탄소계 생물들한테 그런 합리성을 기대하면 안 되지.”
“그렇긴 하지. 그러면 기다리고 있다가 연락 오는 대로 기계 의식을 우리 쪽으로 업로드하고, 근처의 소행성 하나 보내주면 되겠네. 오케이.”
우주선은 항성계를 벗어났다. 두 기계 의식은 기록을 정리하고 압축한 후 하이퍼 통신으로 은하계 중심부의 기계 의식 하이브로 전송했다. 항성 부근을 지나며 슬링샷으로 바뀐 방향을 다음 방문지를 향해 정확하게 보정한 후 워프 엔진을 예열하기 시작했다. 적당한 환경만 주어지면 잡초처럼 생겨나는 지적 생명체가 우주의 평화를 위협하는지 확인하기 위한 정기 점검은 트라헬이나 에르존 같은 하급 기계 의식에게나 맡겨지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쩌면 새로운 동료가 태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워프 비행이 시작되기도 전에 두 양자 프로세서는 파동함수가 가늘게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