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원소
드디어 차례가 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붉은 융단 위를 걸어 연단으로 나갔다. 새로 맞춘 까만 정장 아래에서 심장이 뛰고 있었지만 청중에게는 여유있는 미소만 보일 것이다. 나는 자신 있었다. 앞선 발표자들은 모두 수식과 숫자와 도표에 집착하는 범생이들이었다. 난 아직도 오를로프 박사가 만들어 준 슬라이드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런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건 웅대한 비전이지 골치아픈 열화학 반응이 아니다.
“왕세자 전하, 그리고 귀빈 여러분. 저는 박지우입니다.”
청중을 천천히 돌아보며 일부러 뜸을 들였다. 발표장이 일순간 조용해지자 문서만 들여다보던 파이살 빈 타리크 알 마하디 왕세자가 고개를 들었다.
내가 손짓하자 뒤편 대형 스크린에 애니메이션 영상이 재생됐다. 없는 자금을 쥐어짜 제작한 영상이었다. 드넓은 사막에 태양광 패널들이 촘촘히 깔려 있었고, 그 뒤편 멀리에는 끝이 안 보이는 길고 거대한 벽이 늘어서 있었다. 왕세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세계적으로 주목 받은 옆나라 왕세자의 메가 프로젝트를 보여줄 때 기대했던 반응이었다.
“다들 포스트 오일 시대를 얘기합니다. 하지만 겨우 발전소 하나를 짓는 것과 전 지구적인 에너지 전환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화면이 점진적으로 붉어졌다. 수천 개의 태양광 패널들은 붉은 황무지 위의 검은 웅덩이들로 바뀌었다. 주변에는 짙은 갈색의 침전물이 흘러내렸고, 헐벗은 노동자들이 지친 모습으로 일하고 있었다.
“기존 방식에는 막대한 양의 태양광 패널과 ESS 배터리가 필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환경이 얼마나 파괴될지, 리튬과 코발트, 기타 희토류 자원을 가진 소수 국가에게 얼마나 휘둘릴지 아십니까? 애초에 그만큼의 희토류가 지구상에 존재하기나 하는지 모르겠군요.”
다시 화면이 바뀌었다. 손에 양피지 책을 들고 터번을 머리에 감은 아랍인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우리는 해답을 찾기 위해 땅속을 파헤칠 것이 아니라, 위대한 선조들의 지혜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9세기, 바그다드의 지혜의 집1에서 활동하던 이슬람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발전시켜 세상을 이루는 네 가지 근원적인 요소, 즉 불, 공기, 물, 흙의 개념을 정리했습니다. 알-파라비2와 아비센나3 같은 위대한 학자들이죠. 그들은 이 개념으로 세상의 모든 변화와 균형을 설명했습니다.”
검은 밤. 하늘을 가득 채운 별빛 아래 드론 뷰로 내려다 본 사막. 지평선에서 해가 떠오르자 동심원으로 배치된 수천 개의 반사경4들이 일제히 회전해 중앙에 높이 솟은 타워를 향해 햇빛을 반사시켰다. 태양광이 집중되자 타워의 윗부분이 눈부시게 빛났다.
“불 - 사막의 태양열을 모아 수천 도의 고열을 얻습니다. 물 - 바닷물로부터 산소와 수소를 얻습니다. 공기 - 수소에 공기 중의 질소를 더해 암모니아를 합성합니다. 흙 - 사막의 모래와 태양의 열로 세라믹과 유리를 만듭니다."
타워가 투명해지며 내부가 드러났다. 붉게 달아오른 반응로 속에서 물과 공기가 여러 단계를 거쳐 암모니아로 바뀌었다. 암모니아는 파이프를 따라 거대한 비축 탱크로 이동했고, 반응로의 남은 열기는 용융염에 실려 담수화 시설과 유리 생산공장으로 전달되었다. 생산된 유리는 반사경으로 가공된 후 로봇들에 실려갔다. 카메라가 뒤로 물러나자 바로 옆에 또 하나의 CSP5 플랜트가 건설 중인 모습이 보였다. 카메라가 더 높이 올라가자 거대한 원형 플랜트들이 끊임없이 생겨나 사막을 뒤덮어가는 장관이 연출되었다.
“태양의 열기로 직접 암모니아를 합성하면 전기를 거치는 방식보다 더 높은 에너지 효율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오를로프 박사가 개발한 획기적인 기술 덕분입니다. 게다가 이 플랜트는 사막의 자원과 태양열 만으로 새로운 플랜트를 생산해 스스로 증식해 나갑니다.”
‘자기 복제하는 플랜트’라니, 오를로프 박사가 에너지 효율이나 현지 자원 활용 가능성을 너무 과장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계약서에 작은 글씨로 프로젝트가 진행됨에 따라 기술적인 디테일이 바뀔 수 있다고 적어 넣으면 그만이다. 비전은 거창할수록 좋다. 어차피 계획이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까지 남아있을 생각도 없었다. 컨셉을 검증하는 단계에서 창의적인 회계기법으로 약간의 이윤을 남기고 달아날 계획이었다.
왕세자는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왕세자 전하. 사막의 불, 공기, 물, 흙은 전하의 왕국이 가진 가장 위대한 자원입니다.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영원한 자원이지요. 4대 기본 원소에 제5원소, 즉 전하의 영도력을 더하면 전하의 왕국이 지구를 살리는 역사적 사명에 앞장설 수 있습니다.”
‘제5원소’라고 말하다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왕세자의 머리에서 어깨로 흘러내리는 새하얀 구트라6가 그 옛날 영화 속 여주인공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던 흰 붕대를 떠올리게 한 탓이었다. 입을 꾹 다물고 화면을 넘겼다.
화면에 커다랗게 GAIA: Green Ammonia Integrated Architecture라는 문구가 나타났다.
“이것이 에너지와 자원을 순환시켜 지구를 구하는 통합 아키텍쳐, 가이아의 비전입니다.”
발단은 공항 라운지에서 엿들은 대화였다. 성층권 태양광 발전 프로젝트를 기구 하나 띄우고 ‘제트기류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는 보고서로 마무리 지은 후 남긴 돈으로 크립토에 투자했다가 빈털터리가 된 참이었다. 한동안 할 일도 없었기에 머리나 식힐 겸, 유럽으로 여행 가는 중이었다. 공짜 술을 몇 잔 마시고 소파에 기대 앉아 눈을 감고 있는데 뒷쪽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왕세자가 직접 지휘하는 국부펀드라니까. 그 사람들, 거창한 스토리 좋아해. 그럴싸한 포스트 오일 스토리만 있으면…”
슬쩍 돌아보니 말끔하게 차려입은 젊은 남자가 헤드셋을 쓰고 줌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귀가 먹어서 자기 목소리가 얼마나 큰 지 모르거나, 투자니 사업이니 떠들고 있으면 여성에게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아마추어였다.
당장 노트북을 열고 뉴스를 검색했다. 포스트 오일 산업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다고 조금 전 게시된 기사가 있었다. 지난 주에 핫했던 뉴스 – 멕시코만 해저의 강진으로 메탄 하이드레이트 층이 붕괴하며 발생한 대규모 온실 가스 분출 – 에 자극받아 가능한 빨리 프로젝트들을 시작할 것이라는 언급도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거창한 스토리, 큰 계획이라면 자신 있었다. AI 대화창을 열고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인 아랍의 왕국이 추진할만한 포스트 오일 프로젝트를 요청했다. 이럴 때 ‘SF에 쓸 아이디어’라고 말하면 AI가 현실성의 요건을 완화해 온갖 그럴싸한 개념들을 제시해준다. 그러나 대부분 진부하거나 스케일이 작거나 사막 왕국에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지구 규모의 에너지 전환’에 어울리는 프로젝트가 뭘까? 한 시간 후, 태양광 패널과 전기분해 대신 태양열로 직접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개념을 찾아냈다. 이제 이 열화학 어쩌구하는 방식이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포장해 줄 사람을 구할 차례였다. 최근 기술과는 거리가 멀고, 몸값이 싸야하고, 그러면서도 권위가 있어보여야 했다. 다시 한 시간 동안의 검색 끝에 카자흐스탄의 국립대학에서 얼마 전 은퇴한 레프 오를로프 박사를 찾아냈다.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 러시아어로 썼던 논문은 아무도 안 읽어 볼 것이고 질의응답 시간에 기술적인 허점은 영어와 아랍어, 한국어와 카자흐어가 뒤섞이는 통역 과정에 묻혀버릴 것이다.
그 자리에서 비행기 표를 바꿔 카자흐스탄으로 날아갔다. 예상했던대로 노교수는 자신의 연구에 관심 갖고 찾아온 외국인을 환대해줬다. 그는 낡은 화이트보드에 화학식과 반응로의 구조도를 그려가며 열정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용의 절반은 그의 어눌한 영어 실력과 말라버린 마커 때문에, 나머지 절반은 기술적인 내용이어서 하나도 알아 들을 수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아무튼 화이트보드의 왼쪽에는 태양이, 오른쪽에는 암모니아가 그려져 있었고, 꽤 그럴싸해 보였다.
나는 그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는 얼떨떨해하며 읽어보겠다고 했지만 내가 계약서에서 CTO7라는 문구와 연봉 액수 – 물론 ‘계획대로 프로젝트가 진행될 때’라는 조건을 달았다 – 를 손가락으로 짚어 보여주자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싸인했다.
그로부터 6개월이 흘렀다. 시연일이었다.
그동안 프로젝트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프로토타입 플랜트를 건설할 현지 노동자를 채용했고, 오를로프 박사가 카자흐스탄에서 제자들을 데려왔다. 프로젝트 계약서에는 시연 때 달성해야 할 에너지 효율 목표가 있었지만 걱정하는 오를로프 박사에게 그 목표는 형식적인 것일 뿐이라고 귀띰했다. 나는 ‘플랜트 부지 선정 및 지역 산업계 협력 자문’이라는 모호한 항목을 유연하게 해석해 여유자금을 만들었다.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을 빌리고 왕실 관계자들을 상대로 여러 차례의 설명회와 자문 세션을 열어 값비싼 식사와 선물을 대접했다. 시연회가 끝나는 대로 ‘초기 데이터 분석 결과, 상업화를 위해서는 추가적인 기초 연구가 필요하다’는 비관적인 보고서를 제출하고 빼돌린 자금을 챙겨 이 뜨거운 모래의 나라를 뜰 생각이었다. 애초에 왕세자가 꽂혀 승인했던 프로젝트이니 목표를 조금 미달했다고 아무도 실패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성실하게 (보이도록) 노력했다. (비관적인)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사실이었다.
“지우, 모든 준비가 끝났네.”
오를로프 박사의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돌려놓았다. 지독한 사막의 열기 속에 멀리 신기루처럼 아른거리는 CSP 타워가 보였다. 정식 플랜트의 100분의 1도 안 되는 축소판이었지만, 수십 개의 반사경이 한 점으로 모은 태양 빛은 여전히 눈을 멀게 할 듯 강렬했다.
통제실 안은 바깥과 달리 서늘했다. 파이살 왕세자와 그의 수행단이 시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세자는 여느 때처럼 금실 자수가 빛나는 비슈트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그의 옆에는 처음 보는 젊은 여성이 서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와 다부진 턱선, 몸에 꼭 맞는 세련된 비즈니스 수트를 입은 그녀는 이글거리는 사막의 열기와 떨어져 혼자 다른 평행우주에 존재하는 듯이 보였다.
“자, 그럼 시작합니다.”
내가 고갯짓하자, 오를로프 박사가 떨리는 손으로 메인 스위치를 올렸다. 모니터에 복잡한 그래프와 숫자들— 내게는 외계어와 다름없는 — 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현장의 소리를 전하는 스피커에서 펌프와 파이프들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달아오른 반응로로 수증기와 공기가 흘러 들어갔다. 시간은 지독하게 느리게 흘렀다. 나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제발, 뭐라도 나오긴 해야 할 텐데. 폭발만 하지 마라.
“지금입니다!”
오를로프 박사가 외쳤다. 그가 밸브를 열자, 최종 포집관으로 연결된 작은 유리창 너머로 투명한 액체가 몇 방울 떨어져 내리는 것이 모니터에 나타났다.
“성공입니다! 암모니아입니다!”
노교수는 아이처럼 기뻐하며 외쳤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수백억을 태워 겨우 얻어낸 것이 화장실 청소제 몇 방울이라니. 이제 저 실망한 왕세자에게 잘 변명하고 빠져나가야 할 때였다. 수십 번 연습한 대사를 떠올렸다. 가장 정중하고 안타까운 표정을 준비하며 왕세자 쪽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왕세자의 표정이 이상했다. 그는 실망하기는커녕, 오히려 밝게 빛나는 눈으로 유리창 너머의 CSP 타워를 응시하고 있었다.
“훌륭하군.”
왕세자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는 돌아서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전하, 훌륭하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왕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스터 박지우, 프랑스 팀은 사막에 최적화된 태양광 패널로 수소를 만든다더니 그저 중국산 패널을 사다놓기만 했고, 독일 팀은 바이오연료를 만든다며 사막에서 조류8를 키우다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모두 폐사되었네. 그들에 비하면 자네는 약속한 과정을 보여주지 않았나. 비록 양은 적지만 가능성이 증명된 것이야.”
왕세자의 옆에 서 있던 젊은 여성이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
“이제 남은 과제가 명확해졌군요. 효율 증대와 규모 확장. 공학적으로 가장 도전적인 단계죠.”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 맞는 대사는 생각해두지 않았다.
“전하, 죄송하오나 보시다시피 생산량이 너무 미미하여 경제성을 논하기에는….”
“내가 이 막중한 일을 자네 혼자 해결하라고 하겠나? 추가 자본과 협력사는 내가 알아보지. 이제부터 프로젝트 2단계에 돌입한다. 다음 플랜트 규모는 10배, 예산은 20배로 늘리겠네. 그리고 여기, 내 조카를 소개하지.”
왕세자는 옆의 여성을 가리켰다.
“리일라 빈트 하미드 알 마하디 공주라네. MIT에서 산업공학과 공정 최적화를 공부하고 얼마 전에 돌아왔지. 앞으로 자네와 함께 가이아 프로젝트를 이끌 공동 책임자가 될 걸세. 리일라와 잘 해보게.”
리일라 공주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나의 속내를 전부 꿰뚫어 보고 있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박 대표님, 그 거대한 비전을 어떻게 실현할지 궁금한 점이 많습니다. 당신과 오를로프 박사는 제가 예상한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이미 갖고 있겠죠? 잘 부탁드립니다.”
얼떨떨하게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큰일이다. 망했다. 이제는 정말로 사막에서 암모니아를 만들어야 할 판이었다.
“이런 구조가 실제로 동작했다는 게 놀라워요.”
리일라 공주가 말했다. 그녀는 오를로프 박사의 반응로 설계 도면을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에 입력했다. 첫 단계에서 공기에서 분리한 질소와 산소(N₂ + O₂)가 초음속으로 노즐을 지나며 고온으로 가열되어 일산화질소(NO)로 결합되고, 노즐을 빠져나가는 순간 급속히 팽창, 냉각되었다. 이렇게 포집된 일산화질소는 다시 산소와 반응하여 이산화질소(NO₂)로 변화하는 과정이었다. 나도 이제 대충 뭐가 뭘로 변하는지 정도는 외우고 있었다. 그게 왜 어려운 일인지는 여전히 모르지만.
오를로프 박사가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난 소련 시절에 극초음속 비행체와 로켓 개발에 참여했었소. 그래서 프란틀-마이어 팽창파9를 이용해 가스를 동역학적으로 냉각10하고, 생성된 NO가 다시 N₂와 O₂로 분해되지 않도록 화학평형을 얼려버리는11 충격파 격벽을 형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요.”
이번에는 나 뿐만 아니라 리일라 공주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오를로프 박사는 신이 나서 더 상세한 설명을 하려다가 내 눈치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수퍼 컴퓨터도 없이 그런 구조를 어떻게 구상하고, 또 소재는 어떻게…”
오를로프 박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래 전 과거를 회상하는듯, 창 밖의 CSP 타워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그 당시 주콥스키12에는 로켓 엔진 테스트 후에 버려진 노즐 쪼가리가 널려 있었소. 풍동에서 슐리렌 사진13으로 충격파를 분석하고, 밤새워 사포로 갈아내고, 기름을 발라 표면의 흐름을 확인하고… 그러기를 수백 번 반복했소.”
공주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면서도 오를로프 박사를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건… 예술의 경지네요. 하지만 지금은 21세기잖아요. 제 연구실 동료 중에 AI로 전산유체역학14 시뮬레이션을 돌려 최적화된 구조를 찾아내는 친구가 있어요.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지 연락해 볼게요.”
오를로프 박사가 신나서 연구실로 뛰어간 후, 집무실에는 나와 리일라 공주 둘만 남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계약서 내용을 근거로 공동 책임자는 받아 들일 수 없다고, 리일라 공주에게는 정기적으로 진척 상황과 이슈를 보고하겠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오를로프 박사와 대화하는 모습을 보니 – 비록 내용은 못 알아 들었지만 – 함께 일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잠시 스쳤다. 하지만 시어머니를 계속 옆에 둬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공주 전하,”
“박 대표님,”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나는 공주가 어떻게 오를로프 박사 같은 분을 모셔왔냐고 얘기할 거라고 생각했다. 공주가 말을 계속하길 기다렸다.
“다 알고 있어요.”
“네?”
“당신 같은 사람, 잘 알아요. 여기 오기 전에 조사를 했어요. 비용 처리 기록도 살펴봤고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뭘 얼마나 안다는 걸까. 더 들어보는 수 밖에 없었다.
“거창한 비전을 뒷받침할만한 구체적인 계획이나, 박 대표님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근거가 전혀 없더군요. 그래도 그것까진 괜찮아요. 몇 방울이나마 암모니아가 합성되긴 했으니까. 하지만,”
공주는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들이밀었다. 내가 ‘유연하게’, ‘창의적으로’ 예산을 집행한 항목에 모두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다.
“우리 왕국의 법률에 의거, 당신을 당장 감옥에 넣을 수 있어요. 그렇게 하는게 정의롭겠죠.”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공항으로 뛰어가야 할까? 여권을 어디에 뒀더라?
“공항에 가봤자 소용없어요. 출국금지 명단에 올려놨으니까.”
“비용처리에 문제가 있다면 모두 제가 배상하겠습니다.”
“그럴만한 재정 상태가 아닐텐데요?”
뒷조사까지 했구나.
“파이살 왕세자하고 얘기했어요. 물론 그분도 상황을 다 알고 있어요. 마음 같아선 당신을 구속하고 더 적합한 사람에게 프로젝트를 맡기고 싶지만,”
그녀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시연 때도 말했듯이, 다른 프로젝트들이 모두 중단된 상황에서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구속되는 건 지금 정치 상황에서 별로 안 좋아 보여요. 그래서 우리는 당신에게 이 프로젝트를 계속 맡기기로 했어요. 착각하지 말아요. 겉보기에만 그렇게 하겠다는 거니까.”
당장 잡아 넣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겉보기에만 그런 거라면….
“제가 옆에서 지켜 볼 거고, 진짜 전문가들로 비밀 자문위원회도 구성할 거예요. 대외적으로 비전을 홍보하는 일은 박 대표가 계속 해주세요. 그건 잘 하시는 것 같더군요. 하지만 조금이라도 딴 생각하거나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알죠?”
공주는 다시 서류를 들고 내 눈앞에 흔들었다.
“아, 그리고 오를로프 박사님께는 지금 우리가 나눈 얘기를 하거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분은… 순수한 분이니까요.”
그렇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난생 처음으로 진짜 열심히, 진짜 성공을 위해, 가짜 자격으로 일했다.
‘오를로프 사이클’은 AI에 의한 설계 최적화만으로는 원했던 수준의 효율과 내구성을 달성할 수 없었다. 오를로프 박사와 리일라 공주는 전문가들을 소집해 머리를 맞댄 끝에 마침내 문제를 해결했다. 핵융합로에서 플라즈마를 실시간 제어하는 AI 기술을 응용해 뜨거운 가스를 제어했고, AI가 정교하게 설계한 반응로를 다중 소재 세라믹 3D 프린터15를 이용해 부위에 따라 점진적으로 다른 성분으로 프린트한 경사기능재료16 방식으로 이음새 없이 한 덩어리로 최적화된 반응로를 만들었다.
우리는 에너지와 자원을 최대한 순환시킨다는 비전을 달성하고자 했다. CSP 타워의 고열은 질소 분리와 유리, 세라믹 생산에 사용된 후 그보다 낮은 온도에서 암모니아의 합성, 그 후에도 남은 열은 바닷물을 담수화하는데 쓰였다. 이로써 대규모로 CSP 플랜트를 건설하는 과정에서도 탄소 발생과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담수화 과정에서 부산물로 추출된 염화나트륨은 암모니아와 이산화탄소를 더해 탄산나트륨으로 변환해 유리의 재료로 활용되었고, 마그네슘은 가볍고 튼튼한 반사경 프레임을 제조하는데 사용되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난관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때마다 나는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 오를로프 박사는 일생의 업적을 위해, 리일라 공주는 사랑하는 왕국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현지 업체 외에 한국 업체의 도움도 많이 받았고, 그 과정에서 나는 과거에 빚졌던 업체에 매달려 이번엔 믿어달라고 사정한 끝에 나중에는 고맙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새로 지어진 항만에서 해가 저물고 있었다. 커다란 배 수십 척이 오가고 있었지만 공기는 쾌적했다. 소음도, 매연도 없는 전기추진 셔틀 탱커17들이었다. 배들은 저 멀리 사막 한가운데서부터 이어진 파이프라인의 최종 집결지에서 액화 암모니아를 가득 채운 뒤, 멀리 수평선에 보이는 거대한 배로 향했다.
이 거리에서는 갑판 위 반구형 탱크들의 실루엣만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내가 한국 조선사의 협력을 이끌어내 건조된, 암모니아로 추진되는 세계 최초의 극초대형 암모니아 운반선18 GAIA-01. 가이아 프로젝트의 첫 번째 결실이 한국을 향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까만 정장을 입지 않았다. 먼지가 좀 묻어있는 작업복 차림이었지만, 몇 년 전 연단 위에서 느꼈던 초조함과 가짜 자신감 대신 보람과 진짜 자신감이 가슴을 채웠다.
“어때요, 박 대표님?”
어느새 다가온 리일라 공주가 내 옆에 서서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나를 감시하는 날카로운 눈빛이 아니었다. 지난 몇 년간 수많은 밤을 함께 새우며 문제를 해결해 온 동료였다.
“제가 처음 프레젠테이션에서 보여줬던 애니메이션보다 훨씬 멋집니다.”
내 말에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때 그 엉터리 애니메이션은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가끔씩 보면서 웃죠. ‘자기 복제하는 플랜트’라니,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상상력이었어요.”
“덕분에 여기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왕세자 전하의 영도력, 그 제5원소 덕분이었겠죠?”
나는 짐짓 농담조로 물었다. 그녀는 잠시 먼 바다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불, 공기, 물, 흙… 그냥 원소일 뿐이에요. 그걸로 가치를 만들어내는 건… 우리 같은 사람들이죠. 포기하지 않는 의지, 서로를 믿고 도우려는 마음. 그게 진짜 제5원소예요.”
그때, 등 뒤에서 휠체어가 굴러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더 많아진 오를로프 박사였다. 그는 몇 년 사이 눈에 띄게 쇠약해졌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소년처럼 반짝였다. 그의 제자였던 연구원이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우리 옆으로 온 그는 아무 말 없이 셔틀과 거대한 배를 바라보았다. 그의 주름진 뺨 위로 조용히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지우, 리일라… 보시오. 아름답지 않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아름다웠다. 이대로 몇 시간을 지켜봐도 지겹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누가 뛰어왔다.
“공주님! 3번 플랜트 쪽에서 연락 왔습니다. 새로 개발한 촉매의 효율 데이터를 검토해달라고 합니다.”
“알았어요, 금방 가죠.”
리일라는 나를 돌아봤다.
“가시죠, 박 대표님. 아직 할 일이 많습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앞장서 걸어갔다. 나는 마지막으로 항만을 눈에 담았다. 저 수평선 너머로 우리가 만든 미래가 열리고 있었다.
-
바그다드에 있었던 번역·연구 기관, 그리스 철학 및 과학을 아랍어로 수용·발전. ↩︎
-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해석하고 통합한 이슬람 철학자. 9–10세기 활동. ↩︎
-
의학과 철학에서 영향력 컸으며, 4원소론과 자연철학 다룸. ↩︎
-
헬리오스타트. 햇빛을 일정한 방향으로 반사시키는 거울. ↩︎
-
Concentrated Solar Power. 집광형 태양광 발전. 태양광을 거울로 반사시켜 집광탑에 모아 발생하는 고열로 전기를 발전하거나 열화학 반응에 이용한다. ↩︎
-
사우디아라비아 등지에서 머리에 두르는 천 장식. ↩︎
-
Chief Technology Officer. ↩︎
-
藻類, algae. 물속에서 생활하며 광합성을 하는 생물. 미세조류로 바이오 연료를 만드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
-
Prandtl-Meyer expansion fan. 초음속으로 흐르는 기체가 뾰족한 외부 모서리를 돌아나갈 때, 부채꼴 모양의 팽창파가 발생하며 압력과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공기역학적 현상. 팽창파들이 부채살처럼 퍼져나가기 때문에 ‘팽창 팬’이라 불린다. ↩︎
-
Gas-Dynamic Quenching. 기계적인 냉동 장치 없이, 가스의 흐름 자체를 이용해 급속 냉각하는 기술. ↩︎
-
Freezing the chemical equilibrium. 고온에서만 생성되는 불안정한 화학 물질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냉각해 분자들이 되돌아갈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저온에서 그대로 유지하는 방법 ↩︎
-
모스크바 근교에 위치한 도시로, 소련 시절부터 현재까지 러시아 항공우주 과학의 심장으로 불리는 곳. 공기역학과 유체동역학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러시아의 과학자인 니콜라이 주콥스키의 이름을 땄다. ↩︎
-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의 흐름이나 밀도 변화를 시각화하는 사진 기술. 특수한 광학 장치를 이용해 충격파, 열기류, 가스의 혼합 등을 흑백의 그림자 무늬처럼 보이게 만든다. ↩︎
-
Computational Fluid Dynamics, CFD. 컴퓨터를 이용해 기체나 액체의 복잡한 흐름을 시뮬레이션하는 기술. ↩︎
-
단일 부품을 제작하면서 부위별로 서로 다른 종류의 세라믹 소재를 동시에 사용하여 프린팅할 수 있는 3D 프린터 ↩︎
-
Functionally Graded Material. 위치에 따라 물성이 점진적으로 변하는 소재. 재료 간의 뚜렷한 경계면이 없어,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재료를 결합할 때 발생하는 균열, 파손 등의 문제를 줄일 수 있다. ↩︎
-
Shuttle Tanker. 수심이나 규모의 제약으로 항구에 직접 접안하기 어려운 거대한 선박과 육상 터미널 사이를 왕복하며 특정 화물을 전문적으로 실어 나르는 중소형 운반선 ↩︎
-
Ultra Large Ammonia Carrier. 현재 활발히 건조 중인 초대형 암모니아 운반선 (Very Large Ammonia Carrier, VLAC)보다 더 큰 운반선을 의미하는 작중 용어. 석유를 운반하는 초대형 유조선은 크기에 따라 VLCC, ULCC로 불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