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메스의 케어

테러범 아지트

로봇 탐지견 케이구가 간이 분석을 끝냈다. 나는 마스크를 벗었다. 아직 인공 병원체를 합성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것 같았지만, 요즘 왠지 느낌이 안 좋다. 조심하는 편이 후회하는 것보다 낫다.

수갑을 찬 두 사람이 끌려 나갔다. 애송이들이었다. 체포될 때 반항하지도 않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요즘 같지 않았다. 바이오 테러 사건이 더 자주 발생했고, 테러범들은 사회에 대한 증오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최악의 시대가 정말 끝나가고 있는 걸까? 다들 그렇다고 말하지만, 내 머릿속의 목소리는 세상이 그렇게 쉽고 행복한 곳일 리 없다고 우긴다. 인정한다. 나는 비관론자다.

그때 웅 하는 소리가 났다. 테이블 한쪽 끄트머리의 프린터에서 종이가 밀려 나왔다. 바이오크래프트 X7의 모니터에 ‘분석 완료’라는 표시가 나타났다. 한쪽 벽을 다 차지하고 있는 X7은 최신 소형 자율실험실1로서, 비교적 저렴하면서도 DNA 분석기와 합성기를 모두 내장하고 있어 얼마 전부터 바이오 테러리스트들이 선호하는 모델이었다.

프린터 옆에 널려 있는 작은 부품들이 눈에 띄었다. 가까이서 보니 케어 패치가 분해된 것이다. 패치에서 약물 카트리지를 분리해 놓은 걸로 보아 약물을 분석한 것 같았다. 백신이 안 듣는 바이러스를 만들려고? 그보다는 단지 갓 설치한 장비를 시험해 본 것일 가능성이 컸다. 증거물 가방에 분해된 케어 패치와 분석 결과지를 챙겼다.

“최 선배, 뭐해요? 빨리 정리하고 돌아가죠. 매번 이렇게 쉽게 끝나면 좋겠네요.”

김지수 수사관이 재촉했다.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테러범들이 설치한 장비가 시험 가동을 마치기도 전에 아무런 사고 없이 체포했으니까.

“놓친 거 없는지 잘 살펴봐. 꼭 이럴 때 실수하니까.”

주변을 돌아봤다. 이곳은 경기도 외진 곳에 위치한 폐공장으로 전형적인 비밀 아지트였다. X7 옆의 캐비닛에는 각종 시약 통이 들어 있었고, 가운데 테이블에는 소형 서버 두 대가 놓여 있었다. 한 대는 합성 생물학에 특화된 불법 AI 모델 ‘DeepSeek-SynBio13-Unaligned’를 구동하는 서버였고, 다른 하나는 X7 인증용 서버였다.

다른 자율실험실들과 마찬가지로 X7은 부팅할 때마다 바이오크래프트의 서버에 접속해 인증을 받아야만 동작하고, 모든 작업은 서버에 기록이 남게 된다. X7의 초기 모델은 인증 프로토콜에 취약점이 있어서 로컬 네트워크의 가짜 인증 서버가 인증 과정을 가로채 대신할 수 있었다. 곧 바이오크래프트는 양자 내성 암호2로 프로토콜을 업그레이드했으나, 기존 암호화 방식인 RSA를 사용하는 수백 대가 아직도 암시장에서 유통되고 있었다. 하지만 테러범들은 실수했다. RSA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클라우드의 양자 컴퓨터를 임대했고, 우리 AI가 그 접속을 탐지하고 역추적해 몇 시간 만에 그들을 체포한 것이다.

 

BRC(Bio-threat Response Center, 생물위협대응센터)로 돌아가는 데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온갖 장비를 갖춘 무겁고 느린 특수 차량을 타고 출동한 데다 예상보다 교통이 막혔기 때문이다. BRC 근처 공원에는 오랜만의 따스한 햇볕을 즐기는 사람들로 제법 가득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길에는 배달 로봇밖에 없었는데…. 이러다 우리 감원되는 거 아니에요?”

뻑뻑한 이중 밀폐 도어를 밀어 열며 김 수사관이 말했다. 정말로 감원을 걱정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걱정이 된다. 내 일자리 때문만은 아니다. 상황이 나아졌다고 믿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의학에 특화된 AI와 자율실험실은 의료•제약 분야를 혁신하였으나 동시에 합성 생물학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활짝 열어버렸다. 프롬프트만 입력하면 신종 바이러스를 만들 수 있는데, 좌절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그걸 안 쓴다고? 지금은 폭풍전야일 뿐이다.

“자를 테면 자르라고 해. 그랬다가 상황이 악화되어 다시 부르면 월급을 두 배로 올려달라고 할 거야.”

“글쎄, 그런 날은 안 올 것 같은데요?”

그는 웃으면서 로비의 케어 키오스크에 팔을 집어넣고 렌즈에 눈을 갖다 댔다. 키오스크 내부에서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선배도 케어 패치 쓰면 좋을 텐데요. 피부 알레르기는 치료법이 없대요? 헤르메스한테 물어봐요.”

“난 그런 거 필요 없어.”

BRC가 자랑하는 헤르메스와 케어 시스템은 바이오 테러 시대의 산물이었다. 헤르메스는 생명과학, 역학, 합성 생물학, 나노기술, 정보 보안 등 방대한 지식을 섭렵한 초거대 AI로, 온오프라인의 방대한 정보를 분석해 테러 징후를 감지하고 신종 병원체가 발견되는 즉시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해 냈다. 코로나 때 모든 전문가를 다 합쳐놓은 것보다 더 영리하다는 헤르메스는 케어 시스템과 결합하여 그 능력이 극대화되었다.

케어 시스템은 키오스크와 패치로 이뤄진다. 케어 키오스크는 헤르메스가 설계한 백신의 유전자 데이터를 받아 백신을 주문 생산한다. 케어 패치는 피부에 부착하는 웨어러블 기기로, 온디바이스 AI3가 24시간 생체 데이터를 모니터링하고 내장된 마이크로플루이딕4 통합 약물 카트리지를 통해 맞춤 약물을 미세바늘로 자동 주입한다. 패치 간 근거리 통신으로 수집된 익명 근접 데이터는 역학 추적에 활용된다.

사용자가 정기적으로 가까운 케어 키오스크를 방문해 팔을 넣고 홍채를 인증하면 로봇 시스템이 자동으로 기존 패치를 떼어 내고 수집된 데이터를 헤르메스에 업로드한다. 이어서 로봇 시스템은 맞춤 약제가 주입된 카트리지를 새 패치에 장착하고, 최신 온디바이스 AI 모델과 개인 데이터를 다운로드한 후 사용자의 팔뚝에 부착한다.

케어 시스템은 새로운 유행병에 신속하게 대응할뿐더러 백신을 개인별로 정밀 투여해 효과를 높이고 부작용을 줄였다. 이어서 2세대 시스템에 대사 질환 등 포괄적인 건강관리 기능이 더해지고 그 효과까지 입증되자 초기의 거부감은 사라지고 인기가 치솟았다. 김지수 수사관만 하더라도 패치를 쓰고 난 후부터 체중도 줄고 잠도 잘 잔다고 맨날 자랑한다.

나는 패치를 피부에 부착하는 접착제에 알레르기 반응이 있어서 패치를 사용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AI가 내 몸속에 약물을 넣는 건 왠지 찜찜하다. 헤르메스가 나보다 내 몸을 더 잘 알고 패치가 나처럼 콜레스테롤과 혈당 약 복용을 잊어먹지 않더라도 말이다.


사무실에 돌아와 현장에서 가져온 증거물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소연이 다가왔다.

“별일 없었어?”

소연은 BRC의 촉망받는 연구원이다. 나 같은 평범한 수사관과는 급이 안 맞는 사람이지만, 몇 차례 수사에 도움을 받다 보니 어쩌다 가까워졌다. 그때부터 그녀는 내가 현장에 다녀올 때마다 내게 별일 없었는지 항상 확인하러 왔다.

“응. 애송이들이었어.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소연도 나처럼 선천적으로 의심과 걱정이 많은 타입이었다. 테러 피해가 극심했을 때는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다행히 요즘은 많이 나아졌다.

“이게 뭐야?”

내가 가져온 분석 결과지를 집어 들면서 그녀가 말했다. 나는 분해된 케어 패치가 들어 있는 비닐봉지를 가리켰다.

“테러범들이 X7으로 검사한 결과야. 장비를 시험해 본 것 같아.”

그녀는 결과지의 항목들을 손으로 하나씩 짚어 내려가며 말했다.

“그런 것 같네. 이건 약물 전달용 스마트 폴리머 나노입자5고, 우리 백신이고…. 그런데 이건 뭐지?”

소연은 눈썹을 찌푸리고 손가락으로 결과지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이 데이터 좀 이상해. 이건 크리스퍼6잖아? 왜 유전자를 편집하는 성분이 들어 있어?”

“글쎄… 시약에 묻어 들어갔나?”

생각해 보니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자들이 X7을 활성화하기 위해 양자 컴퓨터를 사용한 걸 헤르메스가 탐지하고 추적한 게 어제 자정이 넘어서였다. 유전자 편집 물질을 설계하고 생산할 시간은 없었다.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을 케어 패치의 약물과 섞어서 분석할 이유도 없었다.

소연은 비닐봉지 속 케어 패치를 BRC의 검사 장비로 가져갔다. 잠시 후 결과가 나왔다.

“이 안에는 크리스퍼가 없어. 아무래도 분석할 때 다른 성분이 섞여 들어갔던 것 같아.”

소연은 테러범들의 검사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전달체로 쓰는 폴리머 나노입자는 우리 건데… 가만, 이것도 변형된 종류가 함께 들어 있어. 우리 건 항원제시세포7를 타겟하는데, 변형된 건 모르겠어. 케어 패치를 통해 유전자 편집 약물을 퍼뜨릴 생각으로 섞어 놓고 각 성분이 영향을 주는지 분석해 본 것 아닐까?”

대상자의 유전자를 직접 변형하는 방식의 테러는 이론적으로 검토되긴 했지만, 아직 현실화된 적은 없었다. 이유 중 한 가지는 사람의 몸속으로 집어넣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케어 시스템에는 여러 겹의 안전장치가 있다. 키오스크를 뜯어 열고 약제 탱크에 몰래 뭘 투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그놈들은 분명 애송이들이었다. 그런 복잡한 방식을 고안할 만한 놈들이 아니었다.

검사지를 계속 들여다보던 소연이 다시 말했다.

“이 가이드 RNA8는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데…. 유 교수님 논문이었던가?”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들고 검색하기 시작했다. BRC의 유진희 센터장은 소연의 대학원 시절 지도교수였다. 소연은 아직도 센터장을 종종 유 교수님이라고 호칭한다. 유 센터장은 인공 조류독감 바이러스에 아들을 잃은 후 정부를 설득해 BRC를 설립하고 헤르메스와 케어 시스템을 개발해 바이오 테러 대응 능력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유 센터장은 대중들에게 인지도와 인기가 높았고, 최근에는 재집권이 확실시되는 현 정부의 차기 보건 부총리로 영입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이상하네. 검색에 안 나와. 연구실 홈페이지에도 없고. 헤르메스에게 물어보는 게 빠르겠어.”

그녀는 분석 결과지를 사진 찍어 헤르메스에게 전송하고 관련 논문을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나도 궁금해서 함께 휴대폰을 들여다보면서 답변을 기다렸다. 평소보다 답변이 지연되었다. 어려운 질문이 아닌데 왜 그럴까?

갑자기 화면에 알림이 나타났다.

BRC 시스템 접근 권한이 중지되었습니다.

처음 보는 알림이어서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내 휴대폰에도 같은 알림이 나타났다. 이어서 소연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스피커폰으로 받았다.

“여기 센터장실인데요. 지금 최진호 수사관과 함께 계시죠? 센터장님이 두 분을 뵈었으면 하는데요. 지금 즉시요.”

그녀는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일어섰다.

“무슨 일이지? 빨리 가보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종잡을 수 없었으나, 내 의심 많은 무의식은 날카로운 경고음을 울렸다. 단순한 오류나 우연일 수 없었다. 우리가 무언가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린 것이다.

“가면 안 돼.”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뭐라고? 왜 안 돼?”

“나도 몰라. 하지만 불길한 느낌이 들어.”

소연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자. 이번만큼은 날 믿어줘. 빨리!”

우리는 황급히 사무실을 빠져나와 비상계단을 통해 건물 밖으로 나왔다. 머릿속에서 여러 불길한 가설의 조각들이 뒤섞였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주차장의 내 차로 뛰어갔다. 자율주행도 안 되고 AI 컨시어지도 없는 구식 차여서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다행히 아무도 우리를 막지 않았다. 아직은.

소연은 내가 휴대폰을 끄라고 하자 잠시 황당해하다가 내 표정을 보고는 더 따지지 않았다. 나는 아침에 갔던 폐공장을 향해 차를 몰았다. 그녀가 말했다.

“네가 뭘 의심하는지 모르겠지만, 유 교수님은 아니야. 내가 그분을 언제부터 알았는데.”

“그걸 확인하려는 거야.”

테러 현장은 다행히 아직 그대로였다. 케이구가 이미 공기 중에 유해 물질이나 병원체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장비 분해 및 철거에는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곧장 바이오크래프트 X7으로 향했다. 소연에게 말했다.

“네 케어 패치의 약제를 분석해 보자.”

소연은 이해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능숙한 솜씨로 자신의 팔뚝에서 케어 패치를 떼어 내 카트리지에서 약물을 채취하고 X7의 시료 투입구에 넣었다. 긴장된 침묵 속에서 X7의 로봇 팔이 빠르게 움직였다.

몇 분 후 모니터에 ‘분석 완료’ 표시가 나타났다. 동시에 프린터가 분석 결과를 출력했다.

“내 패치에도… 크리스퍼가 들어있어.”

소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동안 생각해 왔던 가설을 말했다.

“테러범이 아니라 헤르메스가 이걸 케어 패치에 몰래 집어넣은 거야. BRC의 분석 장비를 해킹해서 혹시라도 검사했을 때 결과에 나타나지 않도록 한 것도 헤르메스고. BRC 장비뿐만 아니라 주요한 분석 장비들은 다 해킹했을 거야. 헤르메스는 테러범들을 네트워크에서 역추적하고 그들의 서버를 해킹할 수 있잖아? 하지만, 이 X7은 제조된 이후 계속 인터넷에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헤르메스가 건드리지 못한 거야.”

“헤르메스가 혼자서 그런 일을 했다고?”

“유 센터장이 관여되어 있겠지. 그래서 우리를 보자고 했을 거고.”

소연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뭔가 생각난 것 같았다. 그녀가 말했다.

“무슨 유전자를 왜 편집하는 건지 알아야겠어.”

소연은 부모님 댁으로 가자고 했다. 나는 언제 누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이곳을 벗어나는데 찬성이었다.

 

어리둥절해하는 소연의 부모님에게 혹시 누가 우리를 찾더라도 모른다고 해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다락방에 올라가 소연이 대학원 시절에 읽던 책과 논문들로 가득한 상자를 뒤졌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끝에 “CRISPR-Cas9 매개 세로토닌 시스템 및 BDNF 발현 정밀 조절을 통한 정서 안정성 증진 연구"라는 유진희 교수의 논문을 찾아냈다. 초록을 읽었다.

현대 사회는 소셜 미디어의 확산과 만성적 스트레스 노출로 인해 우울증, 불안, 공격성 등 정서적 문제의 급증이라는 심각한 공중 보건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기존의 약물 치료나 상담 요법은 증상 완화에 초점을 맞추지만, 근본적인 예방 및 회복에는 한계가 있다. 본 연구는 CRISPR-Cas9 유전자 편집 기술을 활용하여 인간의 정서 조절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세로토닌 운반체 유전자(SERT/SLC6A4)와 뇌유래신경영양인자(BDNF)의 발현을 표적화하고 정밀하게 조절함으로써…

논문은 유전자 편집은 대상자의 세로토닌 레벨 등 여러 지표를 모니터링하면서 정교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케어 패치가 하는 일이었다. 소연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논문에 나온 표적 유전자들 – 세로토닌 관련 유전자랑 BDNF – 그리고 그걸 타겟하는 가이드 RNA가 아까 X7 분석 결과랑 거의 일치해. 변형된 폴리머 나노입자도 이 논문에서 제안한 신경세포 타겟팅 방식이고. 이건… 명백히 이 연구를 기반으로 실제 적용한 거야.”

언제부터 얼마나 널리 유전자 편집이 이뤄졌을까? 나는 다락방의 작은 창으로 밖을 내다봤다. 활기찬 표정으로 유모차를 밀며 지나가는 젊은 부부가 보였다. 세상은 평화로워 보였다. 이 모든 것이 헤르메스와 유진희 센터장이 만들어 낸 ‘케어’의 영향이었을까? 유전자 편집 덕분에 잠재 테러범의 분노가 사그라들고 소연의 우울증이 개선되었을까? 나는 ‘케어‘를 못 받았기 때문에 남들과 달리 세상에 대해 여전히 비관적인 걸까?

소연이 말했다.

“어쩌면 유 교수님의 계획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래. 헤르메스가 유도했을 거야. 인류의 건강을 증진하는 것이 헤르메스의 궁극적인 목표잖아? 교수님의 논문을 읽은 헤르메스가 교수님을 설득했을 거야. 교수님은 바이오 테러로 자식을 잃었는데, 사람보다 더 설득력이 뛰어난 AI의 제안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었겠어?”

AI와 인간 사회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AI의 가치관은 사람들의 글로부터 형성되고 사람에 의해 튜닝된 것이다. AI를 이용하면서 영향을 받는 우리는 거울과 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유 센터장과 헤르메스 중 누가 주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애초에 구분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머릿속 비관론자는 또 다른 가설을 제시했다. 테러가 잦아들고 신체와 정신 건강이 함께 개선되면서 현 정권의 지지율은 사상 최고에 이르고 있었다. 사람들의 행복도를 높이는 손쉬운 방법이 있다면 어떤 정권이 그 유혹을 떨칠 수 있을까? 유 센터장은 곧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책임지는 부총리가 될 예정이었다.

“우리 이제 어떡하지?”

소연이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모든 네트워크를 감시하고 해킹할 수 있는 헤르메스의 방해를 뚫고, 어떻게든 진실을 폭로해야만 할까? 할 수는 있을까? 만약 헤르메스와 케어 시스템이 중지된다면 세상은 다시 테러와 희생, 불안과 분노의 시대로 돌아갈 것이다. 그게 우리가 원하는 결과일까?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방 안에는 낡은 종이 냄새와 함께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나와 소연의 손이 천천히 꺼져 있는 휴대폰으로 향했다.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의 기술트렌드 매거진 ‘이슈픽’ 2025-0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1. AI와 로봇에 의해 자동화된 무인화 실험실 ↩︎

  2. Post-Quantum Cryptography. 양자 컴퓨터의 공격에도 안전한 암호화 기술 ↩︎

  3. 웨어러블 등 소형 디바이스 내에서 동작하는 AI ↩︎

  4. 작은 칩의 미세한 채널에서 극소량의 유체를 정밀하게 다루는 기술. Lab-on-a-chip으로 불리기도 함. ↩︎

  5. Polymer-based nanoparticle for drug delivery. 고분자 물질로 만들어진 수십~수백 나노미터 크기의 약물 전달체. 입자 표면에 특정 세포만 인식하는 분자를 부착해 타게팅할 수 있다. 코로나 mRNA 백신에 사용된 지질 나노입자(lipid nanoparticle) 역시 나노입자 기반의 약물 전달체이나, 주성분과 특성이 다르다. ↩︎

  6. CRISPR-Cas9. 가이드 RNA가 찾아낸 특정 DNA 서열을 Cas9 효소로 잘라내고 세포의 DNA 복구 메커니즘을 이용해 유전자를 편집하는 기술. ↩︎

  7. Antigen Presenting Cell. 면역 체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세포로, 항원을 처리하여 T 세포에게 제시한다. mRNA 백신이 이들 세포에 전달되면 세포 내에서 번역되어 바이러스 항원이 생산되고, 면역반응을 유도하게 된다. ↩︎

  8. CRISPR-Cas9 시스템에서 특정 DNA 위치를 인식하여 Cas9 효소를 그곳으로 유도하는 RNA 서열 ↩︎